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르 Nov 18. 2021

우울함과 행복은 종이 한 장 차이

-인프피 일기 #1




 나는 감정에 예민하고 세밀한 기분의 차이를 잘 느끼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순식간에 우울해질 때가 종종 있다.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가 갑자기 마음 어딘가에서 찌릿하고 작지만 무거운 신호가 온다. 마음 한구석에 그런 미세한 무게감이 느껴지면 내 얼굴에는 웃음이 조금씩 사라지고, 머릿속에는 갖가지 쓸데없는 생각들이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게 어딘가가 계속 찝찝하고 불편한 상태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우울함에 빠지게 되는 날들이 있다. 이건 나만의 ‘우울 감기’이다.



 그런 날이면 기분이 정말 내 밑바닥을 뚫고 점점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느낌이 드는데, 한 번 내려가 버린 후에는 그런 기분을 달래줄 의욕도 함께 사라져 버리곤 한다. 그렇게 우울이라는 어둡고 조용한 웅덩이에 빠져있으면 슬프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한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도 한다. 매번 우울해질 때면 왜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sns 어플이 자꾸 눈에 밟히는 걸까. 핸드폰 화면을 통해 본 다른 사람들의 일상은 결국 나를 더 힘들게 만든다. 다들 잘 살고 있는데, 나는 아직 부족하고 모자란 것 같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가라앉아 버릴 때도 있다. 한 가지 웃긴 건 세상이 나한테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서럽지만, 누구에게도 나의 이 마음을 얘기하고 싶지 않은 이상한 감정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건 생각해보면 먼저 나를 알아봐 달라는 일종의 시위나 마지막 자존심 같기도 하다. 이런 마음들이 바로 ‘우울 감기’의 증상이다. 이런 증상들은 심할 때도 있고 가벼울 때도 있지만, 정도에 상관없이 이 감기에 걸리면 마음이 아프고 힘들다. 여러 가지 감정과 우울한 생각이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나를 한바탕 훑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이 감기에는 정해진 의사도, 처방전도 없어서 해결하려고 나서서 노력하기보다는 그저 가만히 누워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상한 점은 가끔 ‘내가 그런 우울한 감정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뻔한 드라마에 나오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눈물을 또르르 흘리기도 하고, 슬픈 노래만 재생 목록에 잔뜩 담아 틀어두고 가만히 침대에 누워 멍을 때리면 어느새 한결 나아진 기분을 마주하게 된다. 우울한 기분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몇 번 하다 보면 ‘내가 정말 우울함을 즐기는 경지에 이른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그렇게 눈물을 훌쩍이고, 노래를 들으며 우울함을 느끼고 있는 내가 나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나는 역시 천생 인프피 인간인가 보다. 그러다가 핸드폰에 뜬 친구들의 연락에 금세 우울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답장을 하거나 번뜩 떠오른 식탁 위의 간식거리 생각에 방문을 열고 나가서 맛있게 먹는다. 그렇게 또 한 번 나만의 우울 감기가 지나간다.     




 우울함과 행복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이 아닐까? 우울함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새 한 뼘 옆으로 지나가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우울이 조금만 자리를 비켜도 금방 그 자리를 비집고 새로운 마음과 생각이 생겨난다. 그건 정말 짧은 순간이라서 내가 곧바로 알아차릴 수 없기도 하다. 그러니 한없이 쳐지고 슬픈 그 순간을 피하려고 억지로 애쓰면서 힘들어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감정을 똑바로 바라볼 줄 아는 내가 되고 싶다. 어느새 우울함이 지나가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될 테지. 그렇게 한 차례, 두 차례 감기를 앓으면서 점점 내 몸에 우울 면역력을 키워가는 거다. 나중에 더 큰 아픔과 우울이 와도 한 번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도록. 비록 여러 번 쓰러지더라도 나는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우울 항체가 있으니까. 이번 감기가 지나가면 또다시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며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