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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르 Nov 18. 2021

두려움과 담벼락

-인프피 일기 #2


 평범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나에게 깨뜨려야 할 세계일지도 모른다.

 

 모든 새들이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오듯. 지금까지 나는 무엇인지 모르는 알 수 없는 틀 안에서 살아왔다는 기분이 든다. 누가 일부러 나를 가둬놓은 것도 아닌데, 더 넓은 세상과 나 사이에는 길고 높은 담벼락 같은 것이 있어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담벼락 안에 갇혀 조그맣게 나 있는 창으로 내 세상의 바깥을 보았고, 담 위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새로운 곳의 냄새를 맡을 뿐이었다. 담 너머의 세상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매번 신기했고 대단하게 느껴졌지만, 어째서인지 딱히 그들을 동경하지도, 더 넓은 세상을 갈망하지도 않았고 그래서인지 스스로 그 담벼락을 넘어볼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했다. 그저 언젠가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벽을 넘어서 세상으로 떠날 기회가 올 거라고 짐작하기만 했다. 그렇게 평범이라는 틀 안에서 안전하고 얌전하게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아가던 나는 항상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만족했다. 그 안에서도 충분히 기쁘고 재미있는 일들은 일어났고 그런 사소하고 조그마한 사건들은 욕심 없고 겁 많은 나에게 딱 적당한 온도와 크기였다.      


 그렇게 나의 시간은 잔잔하게 물 흐르듯 흘러갔지만, 각자의 담벼락 안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은 서서히 담장 너머의 세상을 궁금해했다. 순식간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하나둘씩 자신의 벽을 부수기 시작하더니 무너진 벽돌들 사이로 펼쳐진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나는 그저 물끄러미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고 조금 우울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내 두 발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묶인 채 담벼락 안에 있었고 나는 아직 때가 아닐 뿐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금도 좋아. 괜찮아.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는걸. 최면 같은 말을 중얼거리면서 친구들의 무너진 담벼락을 바라만 보았다. 그때의 내 마음은 어딘가 까만 질투였을 것이다.



 내가 겁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인정한 건 그맘때쯤이었다. 나는 겁이 많구나. 두려움이 많아서 담벼락 안에 숨어있었던 거구나. 나는 길을 걸어서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길에서는 구를 수 있고, 춤을 출 수도 있고 잠시 멈춰 누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달리는 것조차 무서웠다. 속도를 높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으니까. 춤추는 나를 보고 누가 수군댈지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그 길에는 한 가지 방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몰래 숨겨진 수많은 사잇길이 있었다. 하지만 달리는 걸 무서워했던 나는 가던 방향을 바꾸는 것도 쉽사리 하지 못했다. 혼이 나더라도, 두렵더라도 눈 딱 감고 그 많았던 여러 가지 사잇길로 한 걸음만 내디뎠더라면. 지금보다 조금은 용감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나를 가두고 있던 그 높고 높은 담벼락에 금이 갔을지도 모르는데. ‘너는 겁쟁이야. 담벼락 안의 세상에 만족한다고? ‘그 안에서 행복하면 뭐 해. 너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걸.’ 맞다. 나는 그저 우물 안의 행복한 개구리일 뿐이다.     


 그 애들이 담벼락을 부수고 더 넓은 세상을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담벼락을 부쉈기 때문이다. 높은 담벼락은 스스로는 무너질 수 없다. 벽은 내리쳐야 무너진다. 무너지는 벽의 파편들이 나를 때려도 그 조각들에 몸이 깔리고 뭉개져도 그걸 감당하는 건 각자의 몫이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아픔을 감당해낸 사람들만이 앞으로 펼쳐질 세상을 겪어나갈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한다. 자연스럽게 벽을 넘는 순간이 올 거라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벽은 자연스레 무너지지 않는다. 벽을 무너뜨릴 기회를 찾아야 한다. 다행인 것은 겁쟁이인 나에게도 숨겨진 욕심이 있었다는 거다. 그 욕심은 어렴풋이 느껴지다가 가끔 조그맣게 튀어나왔다. ‘나도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 멀리 가고 싶어. 더 알고 싶어.’ 요즈음 그 덩어리가 꿈틀대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커지는 게 느껴진다. 커다란 두려움에 가려져 채 숨어있던 욕심은 이제 그 두려움을 이기고 담벼락 안의 단조로운 일상에 싫증을 낸다. 이제 이 욕심은 나의 높은 담벼락을 무너뜨리고 나를 새롭고 커다란 세상 앞에 세울 것이다. 내 세계가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 더 많은 걸 알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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