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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르 Jun 11. 2024

빈칸과 삶

규슈 한 달 살기의 시작점




 앞으로 써 내려갈 모든 이야기는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어쩌면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을 만큼 부끄럽고 솔직한 한 사람의 마음 그 자체이다. 

 내가 이곳에 찾으러 온 건 무엇일까. 한 달이라는 시간 속에서 나는 얼마나 달라져있을까. 언어도 가족도 인연도 목표도 없이, 나와 연결된 것은 하나도 없는 이 땅에서 내 것을 찾아 나서는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의 모험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감사하고 소중한 말, 소중한 사람들이 보내온 응원과 사랑의 말이 나를 단단히 둘러싸 지켜주었다. 그 사람들 덕분에 한 발 더 앞으로 내디뎌 볼 수 있었다. 

 모든 게 낯선 공간으로 나를 집어넣어 그 속에서도 익숙함을 발견하고 인연을 만들고 내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일. 나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생각과 감정과 기억들이 쌓여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으면 좋겠다. 그 누구도 아닌 나니까. 나이기 때문에. 나라서 발견한 장면들과 사람들, 장소와 물건들이 생생히 기록되길 바라본다. 



 올해 초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일본에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학생과 사회인의 삶 그 사이 어딘가를 맴돌고 있었는데, 하나의 시절을 거쳐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것이 오래간만이라 갈피를 못 잡고 어영부영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나에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는데 바로 뜬금없이 나타난 거대한 빈칸이 그것이다. 치열한 입시 경쟁을 치러 대학에 입학한 후, 학교를 졸업하고 나에게 맞는 직장을 구하고 그 직장을 꾸준히 다니고 그다음은 뭐 모두가 아는 뻔한 그 순서. 물 흐르듯이 흘러가던 그 순서 사이에 난데없이 빈칸이 나타난 것이다. 뭐지 이거? 다음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하는데? 안 그래도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어서 난감한데, 황당하기만 한 이 빈칸은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냐고. 빈칸을 마주한 이후로 어쩔 줄 모르던 나는 그 앞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서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 이제 어떡해야 해?’ ‘그냥 이대로 못 본 척 가도 괜찮은 건가?’

 한참을 생각하다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내가 선택한 길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니까 나도 모르게 그 순서를 당연한 순리처럼 느껴왔다. 내가 지금 타있는 이 칸이 어느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지 훤히 알 수 있는 대관람차 같은 인생 안에 완전히 속해 있었다. 내 삶은 롤러코스터 같은 역동적이고 시끄러운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1초 앞의 내가 어떻게 움직일지 몰라 마음 졸이고 설레고 긴장하는 그런 미지의 세계가 아니었다. 


 내가 가장 많이 들어온 칭찬은 아마 ‘착하다’ 일 것이다. 착하다는 게 뭔가. ‘튀지 않는 것, 얌전하게 어느 공간에 있던 그 안에 잘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칭찬에 부흥이라도 하듯 나는 말 잘 듣는 모범생 같은 아이로 자라나 이렇다 할 반항의 시기도 한 번 거치지 않았다. 그저 단계를 따라 착실하게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며,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한 번의 의문도 품지 않고 살아왔다. 그렇게 순서대로, 순리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빈칸은 그런 나를 관람차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에게. 너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래? 삶은 네가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면서 살아가는 거야. 그게 진짜 삶이고 진짜 살아있는 거야.

 신이 기회를 준 것 같았다. 나를 너무 사랑하는 신이 진정한 삶을 살아보라고, 앞으로 내가 해내야 할 수많은 선택 앞에서 무너지지 말고 책임지라고, 혼자서 나 스스로를 이끌어 가 보라고. 


 그래서 일본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 연습의 무대가 일본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마음이 정해지자마자 바로 행동에 옮겼다. 이 결심이 흐트러지기 전에, 또 생각이 걱정과 두려움으로 이어져 나를 주저하게 만들기 전에 곧바로 비행기를 알아보고 티켓을 예매했다. 늘 생각이 많아 행동을 방치하던 내가 처음으로 평소답지 않은 짓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 틈 달라진 스스로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나는 잔잔하고 고요하던 관람차에서 나와 변수와 위험이 가득한 미지의 빈칸으로 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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