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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복이 May 15. 2023

값진 경험


지난 일요일은 하늘이 참 푸르고 맑은 날이었다.

코로나로 몇 년간 중지되었던 불국사 어린이 사생대회가 드디어 재개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에 아이들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시원한 공기와 청량한 하늘덕에 주차장입구까지 들어서는 길이 자동차로 꽉꽉 막혔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드디어 그리기 대회에 나가본다며 설레하던 아이들은 달리지 않는 차 안에서 조급해졌다. 어쩔 수 없이 주차는 남편에게 맡기고 아이들만 먼저 데리고 걸어 올라갔다.

다들 얼마나 일찍부터 온 건지 대회접수처까지 가는 길가 잔디밭에는 벌써 자리를 펴고 앉은 사람들로 붐볐다. 경주에서 제일 큰 사생대회이기도 하지만 오랜만에 개최해서인지 유독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오후 세시까지라 급할 것도 없는데 아이들이 서두르는 통에 나도 괜히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림을 그릴지 말지 계속 마음이 왔다 갔다 하던 심쿵이는 접수처 앞에서 마음을 먹고서 그려보겠다고 했다.


못 그리겠으면 그만 그려도 괜찮은 거지?


이제 겨우 다섯 살일 뿐인데, 또래보다 빠른 편임에도 불구하고 세 살 많은 언니와 스스로를 비교하느라 자신 없어 울던 아이가 안쓰러웠는데,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견한지. 잘 그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소풍을 나온 거라고 재차 말해주었다. 아이는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초등학생은 중복참가가 가능하여 사과는 그림과 운문 모두 참가하기로 했다.

웬만큼 좋아 보이는 곳은 이미 자리가 다 펼쳐져 있었고 접수처에서 가까운 나무 그늘아래 우리도 겨우 자리를 잡았다. 살짝 경사가 있어서인지 미끄러질 것 같다며 아이들이 장난을 쳤다. 우리는 자리를 펴자마자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아침에 분주하게 움직여 싸 온 도시락을 열었다. 오이무침에 햄부침, 계란프라이, 김 그리고 김치볶음밥. 특별할 게 없는 메뉴인데 도시락에 담아 야외에서 먹으니 왜 그렇게 꿀맛인지 날씨도 너무 좋고 진짜 소풍 나온 것 같았다.


금세 한 그릇을 비워내고 아이는 구도를 잡기 시작했다.


여기 가운데에 부처님을 그리고 여기는 연못, 그리고 위에 연꽃, 하늘에는 연등도 그릴 거고.


연필로 살살 그려가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작은 캠핑테이블을 펴고 편하게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우리도 테이블 챙겨 올걸. 생각을 못했네... 불편하지?


밑에 깔아줄 거라고 엄마가 나름 생각해서 챙겨 온 것이라고는 반정도 쓰고 남은 스케치북 두 권이 다였다. 그마저도 유용하게 쓰이지 못했던 것은 현장에서 받은 대회용 도화지는 8절 스케치북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괜찮아, 엄마. 이쪽으로 엎드리면 여기가 높아서 책상에서 그리는 거 같기도 해.


아이는 재미있다는 듯이 다 빠지고 없는 앞니대신 혀를 내밀어가며 웃었다.



내가 초등학생 때 친구들과 불국사 어느 담벼락에 쪼르르 기대앉아 김밥을 집어먹으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던 추억이 있다. 조촐하게 12색 수채물감에 팔레트, 물통, 굵은 붓 하나, 얇은 붓 하나만 달랑 챙겨 그림대회를 나갔다.

나무 이젤을 펼쳐두고 멋있게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 사이에서 돌바닥에 스케치북을 깔고 엎드려 그림을 그렸다. 나에게 없는 색은 물감을 섞어가며 만들었다. 진하게도 칠하고 물을 많이 섞어 연하게도 색칠했다. 그날 대회에서 나는 상을 받았다. 비록 큰 상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값진 상이 었다.


내가 바닥에 펼쳐두고 그림을 그렸던 기억에 테이블까지 챙겨갈 생각은 아예 하지를 못했다. 편하게 앉은 다른 아이들을 보자 그제야 아차! 싶었다.

경사지고 울퉁불퉁한 바닥에 폭신한 돗자리에서 작은 스케치북을 깔고 도화지를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면서도 툴툴대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이 고마웠다.

엎드려서 그리던 사과가 경사 때문에 점점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림을 완성하는 동안 4번이나 다시 위로 기어올라갔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큭큭댔다.


어제 부처님을 한 번 연습해 볼걸. 처음 그려봐서인지 너무 어려워.


지우개로 몇 번을 지웠다 그렸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이의 첫 대회를 엄마와 함께 그린 그림을 제출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결과와 상관없이 스스로 끝까지 완성해 보는 것, 상까지 받는다면 성취감과 재미는 몇 배가 되고 말 것이다. 사과가 어려워하는 부분은 스케치북을 펼쳐 쉽게 그리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시범을 보였고 아이는 곧잘 따라 했다.


아이의 집중력과 의지는 대단했다. 두 시간을 같은 자세로 엎드려 그림을 그렸다. 일찌감치 [연꽃이 활짝]이라는 그림을 그려낸 동생이 아빠와 체험부스를 돌며 만들기를 하나씩 들고 와도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나는 옆에 앉아 아이입에 과자를 하나씩 넣어주며 힘을 보탰다.


마침내 완성된 그림과 원고지를 들고 작품을 제출하러 가면서 아이는 그제야 여기저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엄마, 왜 다 어른들이 그리고 있어? 도와줘도 돼?


진짜 그랬다. 엄마와 아빠 모두가 그림 하나에 붙어 색칠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집은 아이는 보이지도 않고 어른들이 그림을 그렸고, 또 어느 곳은 아이는 옆에서 엎드려 핸드폰을 하고 있고 엄마가 붓을 들고 색칠을 하는 집도 있었다. 누구를 위한 그림인지, 대회를 왜 나온 건지. 그 그림이 입상을 한다고 한들 아이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대회에서 오롯이 혼자 그려낸 아이들이 상을 받기란 어려울 수밖에. 아이 앞에서 괜히 내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작품을 제출하고 기념품을 받고 체험부스를 돌아보았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거의 대부분의 체험부스들은 다 마감이었다. 재료가 다 소진되었다고 했다. 아이들은 체험부스를 돌고 부모님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나 보다. 사과가 크게 실망을 했다.


내가 너무 늦게 그려서 그런가 봐. 부채랑 가방은 꼭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늦게 그린 거 아니야. 시간이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뭘.
준비한 수량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왔나 봐. 다음에는 더 일찍 와서 체험부터 하고 그림 그리자!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그림부터 그리고 구경 가자고 했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아쉬운 대로 판박이 스티커만 얼굴이며 손등이며 가득 붙이고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기특한 아이들은 꿀잠을 잤다.


막 샤워를 끝내고 나오는데 사과가 그랬다.


엄마. 아까 엄마가 도와줬으면 나 1등 할 수도 있었을까?
그래도 잘했다고 생각해.
오늘 그린 그림이랑 동시랑 둘 다 꼭 상 받고 싶어. 엄마가 소풍이라고 말해서 나도 그렇게만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
부채도 못 만들고 나 혼자서 열심히 다 했으니까 꼭 상 받으면 좋겠어. 꼭!


엄마도 솔직히 우리 딸들이 상 받았으면 좋겠어.
근데 오늘 참가한 사람도 너무 많았기 때문에 못 받을 수도 있어. 세상에는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엄청 많거든.
그래도 오늘 재밌었지? 날씨도 좋고 반가운 선생님들도 만났고. 상까지 받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즐거운 날이었지?


응. 대회가 어떤 것일까 궁금해서 어제 꿈까지 꿨는데 알게 되어서 좋았어. 이제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대신 미리 연습하고 가야 될 거 같아. 그리고 그때는 꼭 책상 챙겨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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