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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 Mar 20. 2023

청변풍경(廳邊風景)_04. 고요한 대화


얼마 전에 젊은 남자가 여권을 만들러 왔다. 나는 으레 하던 말로 접수 작업을 시작했다.

  “선생님, 본인 확인할게요.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세요”

그는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말했다.

  “본인 확인 좀 할게요, 마스크 좀 벗어주세요.”

같은 말을 두 번째 말할 때는 보통 목소리가 커지게 마련이다. ‘이번에는 제대로 알아들어 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나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두 번째 외침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의 손은 마스크로 향하지 않았다. 손은 왼쪽 귀 쪽으로 올라가더니 톡톡, 본인의 귀를 두 번 두드렸다. 나의 눈은 그제야 그의 귀를 감싸고 있는 투명한 보조 장치를 인식했다. 나는 나의 무심한 처사에 화들짝 놀라며 나는 급격히 조용해졌다.


이런! 버릇이 나왔구나. 나의 시야각은 무진장 좁다. 보통 때에도 어딜 가든, 무얼 하든 나는 내 앞만 본다. 사람들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어야만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꽃이 된다. 아니, 어쩔 땐 꽃조차 되지 못할 때도 있다. 친구 중 하나는, 내게 다가와 ‘터치’ 정도 하니까 내가 당신을 알아보았다고도 말해줬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를 경주마라고 말하곤 한다. 휴, 이번에도 역시 제 버릇을 개에게 주지 못한 셈이다.

     

각설하고 나는 더 이상 목소리를 키우지 않았다. 대신에 손짓을 키웠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내 마스크를 아래로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오른손, 왼손 검지를 보통 때보다 더 위로 올리고 더 크게 흔들면서 지문 스캐너에 올려달라고 손짓했다.

오른손 검지로 동그라미 휘휘 저어가며 이름을 써달라고 손으로 말했다.  

   

대강의 과정이 끝나고 나자 다음은 필담의 순서였다.

-결제는 현금으로 하시나요? 카드로 하시나요?

-여권 받으러 직접 오시나요? 대리인이 오시나요?

-직접 오실 때는 신분증과 접수증을 지참해서 오세요.

등등...     




청년을 보내고 스쳐간 청각 장애인들을 되뇌어봤다.

어떤 부부의 접수는 필담으로만 진행되었다.

어떤 이는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데려왔다.

어떤 이는 본인의 휴대전화를 내 얼굴 앞으로 들이민 적도 있었다. 뭔가 했더니, 음성을 글로 바꿔주는 어플이었다. 그렇게 민원인과 나 사이에 휴대전화를 사이에 두고 접수를 진행한 적도 있었다.

사실, 청각 장애인의 접수량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작업할 때마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기술을 이용한다 해도 접수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언젠가 생각만 했던 것을 드디어 실현할 때가 왔구나.’


그날 밤에 나는 청각장애인용 안내 카드 초안을 만들어보았다. 다음 날 바로 동료 직원들의 피드백을 받고 다듬었다. 여권 접수용, 여권 교부용 안내 카드 더미를 완성했다. 민원대가 한가한 틈을 타, 카드를 인쇄하고 자르고 코팅하고 다시 자르고 구멍을 뚫어 고리로 묶는 과정을 이어 나갔다.

 

만들면서도 혹시 내가 과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나를 흔들어댔다. 그럴 때마다 선배의 피드백과 도움이 더해져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선배는 끝까지 나의 작업을 꼼꼼히 검수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갈무리 작업까지 힘써주셨다. 선배의 도움 덕분에 우리 팀은 우리만의 “러브 액츄얼리”를 노나 가졌다.




오늘 오후쯤에 중년의 남성이 여권을 만들러 왔다. 큰 도움을 주신 선배가 나지막이 한마디 해주었다.

  "이 분 청각 장애인이셔."

나는 큰 결심이나 한 듯이 고개를 크게 두어 번 끄덕거리고 카드묶음을 집었다. 나는 그 앞에서 각 상황에 맞는 카드를 넘겨 보여주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한 장면처럼. 그는 카드를 주의 깊게 읽은 뒤,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기도 했고 1이나 2를 선택하기도 했다.


언제나 소란스럽기만 했던 월요일 오후의 구청에서,
오늘은 우리 둘 만이 고요의 대화를 나눴다.


접수를 끝내고 그는 마지막으로 손가락으로 다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나는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세차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우리는 간단한 목례를 했다. 그는 유유히 구청을 떠났다.


부족하지만, 한참 부족하지만,

만일 적은 손짓만으로 그의 수고를 덜었다면, 나는 기쁘겠다.

그리하여 그의 시간을 아꼈다면, 그것 또한 나는 기쁘겠다.


하지만 모든 상황에 대처할 만한 완벽한 카드는 아니기에 오늘 부족했던 것들을 잊지 않고 보완할 생각이다.

고요한 대화가 이어지길 바라며.


청각 장애인을 위한 안내 카드.  부족하지만 많은 이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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