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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현 Apr 13. 2022

# 14. 운명으로 다가온 폭력의 이면

<차사본풀이>와 폭력의 빈틈

까마귀는 인간 세상에 날아와,
"아이 갈 데 어른 가십시오. 어른 갈 데 아이 가십시오. 부모 갈 데 자식 가십시오. 자손 갈 데 조상 가십시오. 조상 갈 데 자손 가십시오."
이렇게 말해 버리니 순서 없이 누구나 죽어 가게 된 것입니다. (...)
저승 초군문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가득하고 보니, 최판관이,
"어째서 차례차례 오라고 했더니 아이 어른이 다 왔느냐?"
강림이에게 문초를 하니, 강림이는 까마귀를 잡아 문초를 하는데, 적패지는 말 죽은 밭에 들어가서 잃어버렸다고 한다.

안사인 구연, 현용준 조사, <차사본풀이>(1959~1967)



죽음은 인간에게 닥치는 최악의 폭력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맞이해야 할 폭력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필멸(必滅)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죽음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짐가제굿>에서 다루었듯이, 죽음은 그 자체로 온전하지 않습니다. 모든 죽음에는 이유가 있지만 생자(生者)나 망자(亡者)를 충분히 납득시킬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에는 원한이 깃들 수밖에 없고, <짐가제굿>은 이것을 살(煞)이라고 명명했었죠.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원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폭력 자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죽음은 마치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마치 신(神)의 섭리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또 한 편에서 그 운명을 읽어내려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죽음이라는 운명은 어떻게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인가'라는 물음은 그런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결국 망자가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떠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랑선비 청정각시>에서 봤듯이, 저승은 이승에서 배제됨으로써 편입되는 특수한 예외 공간입니다. 그런데 망자는 혼자의 힘으로 저승으로 갈 수 없습니다. 초행(初行) 길이기 때문이죠.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공간에 덩그러니 남겨지게 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설정하기조차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무속(巫俗)에서는 '저승차사'라는 존재를 등장시킵니다. 망자에게 죽음의 때를 알려주고, 그 망자를 저승까지 인도하는 존재가 저승차사입니다.


저승차사는 저승사자라고도 부릅니다. 차사(差使)나 사자(使者) 모두 일종의 '죄인 호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망자는 죽는 순간부터 저승에서 심판을 받고 그 결과에 따라 지옥에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망자는 살아생전의 삶을 심판받는 송사(訟事)의 피고자인 셈입니다.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저승차사는 시왕(十王)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시왕은 10명의 저승왕이기 때문에 '열시왕'이라고도 부릅니다. 고대 인도에서 죽은 사람들의 주재자였던 야마(Yamaraja)를 음역한 염라왕(閻羅王)의 개념이 중국 도교의 태산부군(泰山府君) 신앙과 결합한 후 불교의 지옥 사상에 견인되어 열 명의 왕으로 확대된 것이 시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승차사는 시왕의 부하입니다. 그리고 그런 저승차사에 대한 신화가 바로 <차사본풀이>입니다. <차사본풀이>는 저승차사의 근본(根本)을 풀어내는 제주도 무속의 노래입니다. 제주도의 큰 굿에서 '시왕맞이'라는 제차(祭次)에서 불리고 있죠. 주인공 '강림'은 주호민 작가의 웹툰 <신과 함께>와 그 웹툰을 영화화 한 김용화 감독의 <신과 함께> 시리즈('죄와 벌', '인과 연')에 등장하면서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물론, 신화에서는 영화처럼 강림이 '변호사'의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강림이 저승차사가 되는 과정을 그려낸 <차사본풀이>의 내용은 <짐가제굿>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함경도와 제주도는 한반도의 양 극단에 위치하고 있지만 유사한 내용과 구조의 신화를 많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차사본풀이>와 <짐가제굿>도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북한 지역의 자료는 과거 민속 조사를 통해 채록된 몇몇 각편만 남아 있습니다. 그에 반해 <차사본풀이>는 여전히 제주도의 무속에서 연행되고 있는 신화이기 때문에 많은 각편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안사인 심방이 구연한 <차사본풀이>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옛날 옛적 동경국에 ‘버무왕’이 살고 있었다. 버무왕은 재산이 풍족했고 집안도 잘 다스렸다. 버무왕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다. 위의 4형제는 사주팔자가 좋아 혼인을 해서 분가하여 잘 살았다. 그런데 아래로 3형제는 사주팔자가 나빠서 15세에 죽을 운명이었다.

그때 동관음사 은중전, 서관음사 금법당, 남관음사 노강절, 북항상사 용궁전에 80세가 된 백발의 ‘대사(大師)중’이 있었는데 사주를 보니 자신의 수명이 80세였다. 대사중은 이틀 후에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고 ‘소사(少師)중’을 불러서 자신이 죽으면 화장(火葬)을 해서 서관음사 금법당에 모셔달라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동경국의 버무왕 3형제가 정명(定命)이 15세로 끝이나니, 그 3형제를 법당에 데려와 법당공양을 시키면 명복(明福)을 연장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틀 후에 대사중이 죽었다. 소사중은 대사중의 말처럼 화장을 해서 금법당에 모셨고, 동경국으로 향했다. 소사중은 버무왕 아들 3형제를 만나 15세에 죽을 운명이라고 말해주었다. 버무왕 아들 3형제는 그 사실을 버무왕에게 알렸고, 버무왕은 소사중을 불렀다. 소사중은 버무왕에게 시주를 받고, 버무왕 아들 3형제 머리를 깎은 뒤 동관음사로 데려갔다. 버무왕은 그때 아들 3형제에게 명주와 비단, 은그릇과 놋그릇을 주었다.

버무왕 아들 3형제가 법당에 들어와 부처님께 불공을 드린 지 3년이 되었다. 단풍놀이를 나온 버무왕 아들 3형제는 부모가 너무 그리워서 소사중에게 집에 다녀와도 되겠냐고 물었다. 소사중은 이제 대사중이 되어 있었다. 대사중은 ‘광양땅을 조심해서 지나가라’로 경고했다. 그리고는 버무왕에게 받은 재물을 아들 3형제에게 나누어주었다.

버무왕 아들 3형제는 동경국으로 향하다가 광양땅에 들어서니 배고픔을 느꼈다. 그래서 광양땅의 천하거부(天下巨富)인 ‘과양생이’ 집에 들렸다. ‘과양생이의 처’는 처음에는 3형제를 내쫓았지만, 결국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다. 3형제는 고마운 마음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재물을 모두 과양생이의 처에게 주었다. 그러자 과양생이의 처는 3형제를 사랑방에 들이고 술과 안주를 넉넉하게 차려주었다. 3형제는 술에 취해 몸과 정신을 가다듬지 못했고, 과양생이의 처는 그때 3년 묵은 참기름을 청동화로의 숯불에 졸여서 3형제에게 부었다. 3형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죽어버렸다. 과앙생이의 처는 3형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재물을 챙겼고, 과양생이는 3형제의 시체를 주천강 연화못에 던져버렸다.

일주일이 지난 후, 과양생이의 처가 주천강 연화못에 빨래를 하러 가보니, 웃는 꽃, 슬프게 우는 꽃, 화를 내는 꽃 3송이가 떠 있는 것을 보았다. 과양생이의 처가 꽃을 꺾어 집으로 가져오자 꽃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과양생이의 처는 꽃을 청동화로의 숯불에 집어넣었고, 꽃은 삼색 구슬이 되었다. 과양생이의 처는 구슬을 가지고 놀다가 삼켰는데, 그때부터 태기(胎氣)를 느끼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과양생이의 처는 아들 3형제를 낳았다.

과양생이의 아들 3형제는 어려서부터 명석했다. 15세가 되었을 때, 과양생이 아들 3형제는 과거 시험을 보러가서 급제를 했다. 그 소식을 들은 과양생이의 처는 7일 잔치를 열었다. 아들 3형제는 집에 돌아와 과양생이 부부에게 절을 올렸다. 그런데 3형제는 절을 하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죽어있었다.

억울함을 풀 수 없었던 과양생이의 처는 김칫고을 ‘김치 원님’에게 소지를 올렸다. 계속되는 소지에 김치 원님은 부하인 ‘강림’에게 저승의 염라왕을 잡아 오라고 시켰다. 강림은 18명의 첩과 함께 사는 똑똑한 호색한이었다. 강림은 저승의 염라왕을 잡아올 방법을 몰라서 고민하다가 18명의 첩을 뒤로 하고 자신의 부인을 찾아갔다. 부인은 강림을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조왕 할머니’에게 강림이 갈 길을 인도해달라고 축원을 올렸다. 조왕 할머니의 인도를 받아 강림은 저승으로 길을 떠났고 ‘청태산 마구할망’과 ‘문전신’, 길 위의 ‘나장(羅將)’에게 도움을 받아 저승 초군문에서 염라왕을 만났다. 염라왕은 이틀 후에 김칫고을 동헌(東軒) 마당으로 내려가겠다고 약속했다.

이승으로 돌아온 강림은 부인의 집으로 갔다. 강림이 저승에서 3일을 보냈는데, 이미 이승에서는 3년이 지나 있었다. 김치 원님은 강림이 잡으라는 염라왕은 잡아 오지 않고 그동안 도망가서 숨어있던 것으로 알고 감옥에 가두었다.

이틀 후에 염라왕은 김칫고을 동헌에 나타났다. 강림은 감옥에서 나왔고, 김치 원님은 염라왕에게 과양생이 아들 3형제가 갑자기 죽은 연유를 물었다. 염라왕은 과양생이 부부를 불렀고, 아들 3형제를 묻은 곳을 파보라고 했다. 그곳에는 아들 3형제의 시신 대신 칠성판만 있었다. 염라왕은 금부처로 주천강 연못을 세 번 때렸다. 그러자 주천강 연못의 물이 말라버리고 그 안에 있던 버무왕 아들 3형제의 죽은 시체가 나왔다. 염라왕이 금부처로 다시 세 번 때리자 버무왕 아들 3형제가 살아났다. 염라왕은 버무왕 아들 3형제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과양생이 부부를 잔인하게 찢어 죽였다. 그러자 과양생이 부부는 죽어서 각다귀, 모기로 환생했다.

염라왕은 강림이 탐나서 김치 원님에게 빌려달라고 했다. 김치 원님이 그럴 수 없다고 하자 염라왕은 강림의 육신과 영혼을 나누어서 갖자고 제안했다. 김치 원님이 육신을 선택하자, 염라왕은 영혼을 빼서 저승으로 데려갔다.

강림이 저승에 가자, 염라대왕은 강림에게 “여자는 70세, 남자는 80세로 정명을 정하여 차례차례 저승으로 와라”라고 적힌 적패지를 인간 세상에 전달하라고 명령했다. 강림은 적패지를 들고 인간 세상에 오다가 힘이 들어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때 까마귀가 와서 자기가 대신 적패지를 인간 세상에 전달하겠다고 했다. 강림은 까마귀에게 적패지를 주었고, 까마귀는 인간 세상으로 날아가다가 적패지를 잃어버렸다. 까마귀는 인간 세상에 와서 “아이 갈 때 어른 가십시오. 어른 갈 때 아이 가십시오. 부모 갈 때 자식 가십시오. 자손 갈 때 조상 가십시오. 조상 갈 때 자손 가십시오.”라고 전달했다. 그때부터 인간들은 순서 없이 죽게 되었다.

염라왕은 강림에게 ‘동방삭’을 잡아오라고 했다. 강림은 꾀를 써서 3천 년을 넘게 산 동방삭을 잡아서 저승으로 데려갔다. 염라왕은 강림이 똑똑하니 인간을 잡아오는 인간차사가 되라고 말했다. 그 후로 강림은 인간차사가 되었다.


<짐가제굿>과 상당히 유사한 모습입니다. 다만, 강림이 염라왕을 찾아 떠나는 장면이 <짐가제굿>에 비해 더욱 험난한 것으로 그려지며, 적패지(赤牌旨)와 관련된 후일담이 덧붙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적패지에는 여자는 70세, 남자는 80세라는 정명(定命)이 적혀 있습니다. 정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입니다. 조금 더 면밀하게 따지면 적패지의 정명은 운명보다는 숙명(宿命)에 가깝습니다. 숙명은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된 수명이기 때문입니다. 


적패지에 적혀있는 바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난 순서대로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10년 정도 더 살 수 있지만, 같은 성별 안에서는 결코 늦게 태어난 인간이 먼저 죽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차사본풀이>에서는 강림의 안일함과 까마귀의 실수가 겹치면서 그 순서가 뒤죽박죽 섞이게 됩니다. 강림에게 넘겨받은 적패지를 인간 세상에 온전히 전달하지 못하고 까마귀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외칩니다. “아이 갈 때 어른 가십시오. 어른 갈 때 아이 가십시오. 부모 갈 때 자식 가십시오. 자손 갈 때 조상 가십시오. 조상 갈 때 자손 가십시오.” 원래는 어른이 죽은 후 아이가 죽어야 합니다. 부모가 죽은 후에 자식이 죽어야 하고요. 조상이 죽어야 자손이 죽습니다. 그것이 본래 순서였었죠. 그런데 까마귀의 외침으로 인해 아이가 죽은 후에 어른이 죽고, 자식이 죽은 후에 부모가 죽고, 자손이 죽은 후에 조상이 죽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적패지를 잃어버리고 죽음의 순서가 뒤섞이면서 저승은 난리가 납니다. 적패지를 그대로 인간 세상에 전달했으면 인간들은 태어난 순서대로 차례에 맞게 저승에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저승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저승에서는 도저히 감당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죽을 때가 되면 이승의 인간을 저승으로 데려오는 '저승차사'라는 직업이 만들어집니다. 제 1호 저승차사는 일의 원흉인 '강림'입니다.


적패지 분실 사건을 통해 견고하게만 보이던 죽음이라는 운명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믿었던 운명은 사실 순서도 없이 뒤죽박죽인 체계 속에서 저승차사에 의해 겨우 유지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서 3천 년의 세월을 살아간 '동방삭'이라는 인물이 서사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동방삭은 적패지가 사라지기 전부터 이미 운명의 빈틈을 찾아내어 자신의 삶을 지속시킨 인물입니다. 운명으로 다가온 폭력의 이면(裡面)에는 이렇게 그 폭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틈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승차사'라는 존재도 이런 빈틈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강림은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적패지를 까마귀에게 맡기는 실수를 저지르죠. 저승차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 역설적이지만 인간미가 넘치는 저승차사는 '인정'에 약합니다. 뇌물에 약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저승차사의 모습은 『불설예수시왕생칠경(佛設預修十王生七經)』과 같은 불교의 경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 경전에 언급된 방식대로 저승차사를 융숭하게 대접하면, 죽음의 문턱에 선 자라 하더라도 생사기로(生死岐路)에 놓인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라 저승차사를 어떻게 모시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에 대해서는 <장자풀이>에서도 확인한 바 있었습니다.


저승차사는 죽음이라는 폭력을 몰고 오는 존재입니다. 동시에 저승차사는 죽음이라는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적 근거도 마련해줍니다. 죽음은 주어진 운명 같이 느낄 수 있지만, 인간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변화는 저승차사와 같이 폭력을 몰고 오는 타자에 대한 환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환대는 죽음을 삶으로 전환시키며 자동적으로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해줍니다. 폭력을 사유하고 성찰함에 있어서 신화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의외로 명료합니다. 바로 '환대'입니다. 


환대의 필요성은 신화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손님굿>에서도, <장자풀이>에서도 환대는 신화를 읽는 중요한 열쇠어였습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현실에서는 죽음을 몰고 오는 존재를 환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신화의 세계처럼 환대가 무조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지도 않습니다. 신화는 자기 완결성을 가진 문학적 산물이기에 결핍은 해소로, 문제는 해결로, 위기는 기회로 이어지는 서사적 관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화와 현실을 동일시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죠. 


하지만 신화가 던져주는 메시지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폭력에 대응할 수 있는 일정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화라는 매개를 통해 폭력을 사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화가 던져준 것은 폭력 또는 폭력을 몰고 오는 타자에 대한 환대입니다. 그것을 무조건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하기보다, 환대의 가능성을 고민해 보고 환대를 통해 폭력 너머의 삶을 기획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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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효,「무속신화에 나타난 죽음 인도신, 저승차사의 인물 형상화 양상」,『일본학연구』46, 단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송미경,「사령형(使令型) 인물의 형상화 양상 및 전형성」, 『구비문학연구』32, 한국구비문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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