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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현 Jun 14. 2021

# 13. 폭력으로 다가온 운명을 넘어서

경청이라는 환대의 방식

"엉겁결에 규정을 어긴 인간에게 신들이 불합리해 보이는 폭력을 휘두르고, 인간은 그것을 ‘운명’으로 감수하고 죄과를 피로 갚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신화’의 에피소드에 자주 보이는 것과 동형적인 구도가 여기에 존재한다."

우에노 나리토시 지음, 정기문 옮김,『폭력』, 산지니, 2014.



<장자풀이>를 보면, 사마 장자는 타자를 환대하지 않습니다. 여러 명의 타자가 사마 장자에게 박대를 당했었죠. 처음에는 사마 장자의 조상들과 마을 사람들이, 그다음에는 열시왕이 내려보낸 '중'이 사마 장자의 환대를 바랐지만, 사마 장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옆에서 사마 장자의 며느리가 환대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이야기 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죠. 그러다가 '죽음'이라는 최악의 폭력이 불현듯 사마 장자에게 찾아오게 되고 사마 장자는 그 죽음의 징조 조차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열시왕은 사마 장자에게 '꿈'을 통해 미리 위기 상황을 경고하지만 사마 장자는 이를 길몽(吉夢)으로 여길뿐입니다.


'꿈'이 재미있는 이유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관점에 따라서 해석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죠. 사마 장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죽을병에 걸리고 저승사자들이 찾아오는 상황이 황당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사마 장자는 뜬금없이 찾아온 이 죽음의 위기를 '운명(運命)'처럼 맞이했을 겁니다.


운명을 영어로 번역하면 destiny, fate, fortune 등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중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destiny입니다. destiny는 '신(神)에 의해 사전에 결정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운명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상당히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운명은 숙명(宿命)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운명이 태어난 후에 결정되는 것이라면, 숙명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라는 본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destiny는 운명보다 숙명에 가까운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운명은 행운(幸運)과 불운(不運), 길운(吉運)과 액운(厄運) 등으로 구분됩니다. 좋은 운과 그렇지 않은 운으로 양분되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현실적으로 문제 되는 것은 불운과 액운과 같은 부정적인 것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바꾸어나가려는 인간의 의지는 수많은 서사를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흔히 '영웅'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은 운명을 개척해나가기도 합니다. 영웅의 서사에 우리가 매료되는 이유는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나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운명을 바라보는 시각은 양분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운명이 이미 초월적으로 정해지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운명을 인간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개척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운명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에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후자는 반대로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운명이 좌우된다는 관점입니다.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폭력의 한 형태일 수도 있지만 그 폭력 너머의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운명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동시에 적절한 방도를 통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기회로도 인식됩니다. 사마 장자와 같은 존재도 단명(短命)할 뻔한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놓았지요. 이때 사마 장자가 했던 행동은 타자에 대한 환대였습니다. 그동안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타자들을 향한 환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을 무조건 이타적 행동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도킨슨(Richard Dawkins)이 『이기적 유전자』에서 언급했듯이, 이타적인 행동도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마 장자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우마 장자나 자신이 타고 다니던 백마를 대신(代身) 저승사자들에게 보내려고 했었지요. 사마 장자의 환대는 철저히 이기적인 동기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환대의 계기는 이기적일 수도, 이타적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경청(傾聽)입니다. 傾은 '기울이다'라는 뜻인데 주의를 기울이고, 귀를 기울이고, 타인을 향해 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기울여야 다가갈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경청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청은 타자와의 만남이며, 나를 얽어매고 있던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엄기호에 의하면 경청은 우선 남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라고 합니다. 건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듣는 것이며 자신이 모르는 것,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는 것을 '경청'이라고 정의 내립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경청은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넘어 타자의 말이 지닌 '타자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모르는 것, 아직 만나보지 못한 이야기, 내가 알 수 없는 말로 전달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야 말로 온전한 '경청'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청을 통해 자기도 모르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자기 삶에 내재되어 있는 타자성을 경청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타자성을 발견하는 방식에는 '환대'와 '적의'가 있습니다. 환대는 경청을 통한 타자성의 발견에서 비롯되고, 적의는 타자성을 부정할 때 일어나는 태도입니다. 환대(hospitality)와 적의(hostility)는 어원상 모두 주인(host)과 관련이 있습니다. 환대는 타자를 host로, 적의는 자신을 host로 여기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청은 환대의 입장에서 타자를 내 삶의 체계 속에 위치시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 장자는 며느리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때 죽을 운명에서 벗어납니다. 조상들과 마을 사람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죽을 운명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기만 알던 사마 장자는 이제 타자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타자를 적의로 대하던 사마 장자에게 있어서 이 변화는 굉장히 극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 장자에게 찾아온 극적인 삶의 변화는 폭력처럼 다가온 운명을 맞이했을 때 시작됩니다. 어떻게 보면, 폭력과 운명은 닮아 있습니다. 운명은 폭력과 같이 피할 수 없는 것이며, 태어났을 때부터 우리의 삶에 억압적으로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폭력에 대해 사유할 때 '운명'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운명에 대처하는 인간의 방식을 살펴보다 보면, 폭력에 대한 대처 방식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자를 경청함으로써 운명을 바꾼 <장자풀이>의 사마 장자처럼, 우리나라 신화에서는 운명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갑자기 죽음과 같은 폭력적인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는지, 그런 운명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등등 신화는 폭력 너머의 새로운 운명을 쟁취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제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신화에 따라 그 방식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지만, 기본적으로 '경청'이라는 공통적인 태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폭력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결국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셈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정재민, 『한국 운명설화 연구』, 제이앤씨, 2009.
엄기호, 『단속학회』, 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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