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원 마누라는 귀부인이라고요?
저도 한 때는 그런 줄만 알았어요. 동남아로 일하러 가는 남편 따라가는 전업주부들은 모두 골프 치러 다니고 매일 마사지받으러 다니며 탱자탱자 놀러 다니고, 그동안 집안일은 메이드 아줌마가 다 해주는 줄 알았지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귀부인 같은 처지인 줄로만 알았어요.
와서 직접 겪어보니 실상은 전혀 아니올시다!
어떤 사람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부인으로 변신하기도 합니다. 저도 처음엔 뭣도 모르고 귀부인 놀이를 했는데 이건 내 삶의 방식과 안 맞는구나 싶은 순간이 오더라고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무수하니 돈을 아껴야 하기에 씀씀이가 커지지 않게 노력해야 하는 것도 그렇지만, 안 맞아요. 체질적으로.
귀부인으로 가는 3종. 골프, 마사지, 메이드.
동남아에 살 때 다들 배운다는 골프도 대세에 휩쓸리듯 시작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막상 해 보니 재미도 없는 데다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데서 운동하는 게 힘들어서 그만두었어요.
마사지도 여행 때처럼 한두 번 받을 때나 즐겁지, 몸이 쑤시는 날이 아니면 귀찮기만 합니다. 비싸고 고급스러운 스파가 아닌 이상 몸에 기름 묻힌 채로 나와야 해서 입던 옷도 세탁해야 하고 목욕도 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번거롭습니다.
그러면 고급스러운 곳을 가면 되지 않냐고요? 가격이 천지 차이라 선뜻 선택하기 되지 않더라고요. 그런 곳은 주로 샤워 시설이 있고 스파용 옷을 빌려줄 뿐, 더 위생적인 건 아니거든요.
메이드가 일해주는 것도 제 성에 안 차니 별 수 없었네요. 이 나라 사람들의 위생 관념이 우리와 같을 것이라 생각하면 큰일 나기에,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줘도 한국인의 맘에 들기는 힘듭니다. 게다가 저는 혼자 맘 편히 뒹굴고 싶은데 일하는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불편하고, 아이를 본다는 게 아이와 즐겁게 놀아주는 게 아니라 그냥 지켜보는 것이라는 걸 이해할 수 없고, 언어의 장벽도 있는 데다 생각의 차이가 커서 내가 원하는 바를 이해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사람이라면 메이드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 내가 직접 다 하는 게 마음이 편할지도 몰라요. 아니면 돈은 값어치 없게 쓰고 메이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가, 그분이 어떻게 일하든 관여 않고 관심을 끄던가요. 이곳의 메이드 분들에게는 한국인 도우미 아줌마와 같은 깔끔한 수준의 청소와 일처리를 기대하면 안 됩니다.
네, 불만 투성이죠? 당연한 듯이 너무 기대를 했나 봐요. 그만큼 실망이 컸습니다.
주재원 마누라는 놀러만 다닌다고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네일케어 받으러 다니는 게 좋아 보이는 건, 그저 동남아스러운 나무와 풀이 우거진 자연환경에 의해 미화되어서 그렇습니다. 내 나라에 흔히 보이는 그저 그런 나무가 아니어서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고, 해외여행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환상이 필터를 씌워주었을 뿐입니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네일케어는 하지 않나요. 게다기 음식은 한국에서 먹는 한식이 내 입맛에도 맞습니다. 평생 과자만 먹고살 수는 없지 않겠어요? 입맛에 안 맞는 음식이란 과자와도 같은 것일 뿐이에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베트남으로 이주한 것이 아닌 이상 이곳에서 의미 있게 할 일을 찾기 힘들 정도로 이곳의 문화 수준은 낙후되어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다 지친 엄마들은 독박 육아에 지친 마음을 아이가 학교나 유치원에 간 동안 달래야 하죠.
네, 독박 육아요. 한국이나 베트남이나 다를 것 없어요. 한국에서만 하던 독박 육아를 여기에 와서도 해야 합니다. 독박 육아가 아니었던 사람도 어느 새인가 독박 육아를 하게 됩니다. 남편의 한국 회사가 베트남에 지사를 차려도 한국 회사는 한국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본사에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하던 대로 일을 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재원의 가족 체류 비용을 지원해주는 회사가 많은데, 그 비용이 어마어마하니 거기에 걸맞은 양의 일이 주어진다고 생각하면 되겠어요.
한국에서 일하는 회사원이라면 회사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친구에게 가볍게 연락해서 저녁 먹으며 회포를 풀 수 있습니다. 오늘 안되면 내일, 그것도 힘들면 주말에, 어떻게든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 쌓였던 이야기도 하고 회사 동료 욕도 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그런데 주재원은 상황이 다릅니다. 가족도 딸려서 친구를 고를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거니와 현지에서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아서 마누라가 친구가 되어 줘야 해요. 그러다 보면 마누라가 회사 일을 꿰고 있게 되고, 남편의 히스토리를 알고 있는 좋은 말동무가 됩니다. 저는 이대로 출근을 해도 모든 일을 다 해치울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주재원의 마누라는 귀부인이 아니라 그냥 월급 못 받는 주재원이나 마찬가지네요.
코로나로 인해 저희 집 주재원의 재택근무가 시작되고 나니 상황은 더 심해졌습니다. 방 한 칸이 통째로 회사가 됐어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고 그나마 만나던 사람들도 못 만나게 된 저희 집 주재원은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저에게 미주알고주알 풀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마누라 말고는 들어줄 이가 아예 없는 걸 아니까 그만하라고는 못 하겠지만, 제게 다가오는 발소리만 들어도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휴.
나도 베트남 가고 싶어. 주재원 말고 주재원 마누라로!
저렴한 물가가 좋아 보인다고 그렇게 제게 말했던 친구에게 지금이라도 답해 주고 싶네요. 외국인으로서 살아가다 보면 여행 왔을 때와 같은 물가를 느낄 수 없어서 힘들어질 거라고. 결국 제 값어치 못 하고 있는 돈 쓰기 싫으니 메이드 없이 혼자 집안일 다 하고 애도 혼자 보고 있을 거라고! 한국 음식이 그리워서 한인 마트에서 파는 한국산 수입 식재료와 간식을 한국보다 비싼 가격으로 사게 될 거라고!
여행자 체감물가와 체류 외국인 체감물가는 다릅니다. 실제로 베트남에서 체류하는 외국인의 체감 물가는 세계적인 수준이었습니다. 대체 왜 베트남, 베트남 하는 걸까요!
아아… 남편이 또 할 말이 있다는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