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그냥 넘어가. 걱정할 거 없어. 괜찮아질 거야."
오만 잡생각이 많고 감수성이 넘쳐서 대수롭지 않은 일이 없는 나는 이런 타박을 많이 받았다. 충고였지만 내 성향을 부정했고 조언이었지만 평가였다. 내 존재의 특성을 부정하는 타인의 평가를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수치심을 가져다주는 타인의 시선에 나를 쉽게 내맡겼다. 그것을 의심 없이 수용하고 내면화했다. 진짜라고 믿고 끊임없이 자신을 속였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요동치는 감각을 의지만으로는 억누를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도 예민한 기질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할까? 별것도 아닌 일로 왜 이렇게 쉽게 힘들고 지치는 것일까?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을 왜 이 모양을 하고 힘들어하는 걸까? 스스로에게 모난 질문을 쏘아 부치며 예민함이라는 나만의 특성을 부정했다.
나는 외부자극에 민감하다. 어떤 경험이나 정보를 깊숙하게 받아들인다. 스펀지, 습자지처럼 환경과 상황을 그대로 흡수한다. 표정, 말투, 분위기 등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저장되어 에너지가 쉽게 소진된다. 무심코 넘길 것과 삼킬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상황에 깊게 빠진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걸까? 이젠 어떻게 되는 거지?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생각을 확장하며 탐색했다. 순식간에 타인과 상황에 전염되어서 피로해졌다. 밀착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더 빠르고 쉽게 감정을 이입했다. 생소한 장소와 낯선 관계에서 긴장하는 일이 잦았다. 낯설고 생소환 환경이 주는 자극을 피하려 관계와 일에서 조심스러워졌다. 지레 할 수 없다고 선을 그어버리기도 했다. 새로운 관계와 직무에 노출되는 일을 꺼려했다. 예민하고 민감한 특성을 비난하고 이용하려는 사람들을 피해서 나를 숨기며 세상이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남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민감한 감각이 스스로도 기묘하고 불편했다. 내가 속한 세계와 상황을 온 감각을 동원하여 지각하고 이해했다. 기질적으로 불안한 정서는 예민한 감각을 만나서 상호작용을 일으켰다. 일렁이는 감정과 넘치는 생각을 조절하지 못했다. 마음과 연결된 몸의 감각이 막히고 끊어지며 흐트러졌다. 모든 상황을 둥글게 넘기지 못하고 예민하고 까다롭게 구는 내가 유별나고 유난스러워서 싫었다. 요즘같이 성과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예민함은 쓸모없는 기질이라고 생각했다. 예민함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부정적인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내 성향을 거부하고 비난하며 감추려고만 했다.
직장에서 오가던 사소한 대화나 사건들, 운전 중 도로를 지나치며 우연히 본 장면, 산책하다 발견한 사람들을 사진 찍듯이 선명하게 기억한다. 찰나의 사건과 장면에 멈춰서 공상과 상상에 빠진다. 장소와 공간과 상황과 사람의 분위기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불쑥 다가와서 내가 원하지 않는 감정을 일으킨다. 일상에서 시작된 생각의 조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밤늦도록 나를 뒤쫓아온다. 늦은 밤 상상과 공상으로 지어낸 수천 개의 성을 오가며 뒤척이다 잠들기도 한다. 실체 없이 떠다니는 상념에 얽매여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은 재난이나 전쟁에 대한 보도를 보고 나면 그들의 공포와 아픔을 느낀다. 슬프고 아픈 영화를 보면 며칠 동안 아리고 아픈 상태에 빠진다. 즐겁고 유쾌한 영화를 보면 며칠을 들떠서 지낸다. 강렬하고 자극적인 상황일수록 몰입하고 빠르게 동기화된다. 의식적으로 통제하려 해도 마음은 슬픔, 아픔, 상실, 두려움, 불안, 공포라는 감정으로 격동한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감각은 민감하고 유별났다. 상황이 복잡하고 다양할수록 사람들이 많고 분주할수록 쉽게 소진되어 피로해졌다. 사건이 끝나고 상황에서 벗어나도 감정을 털어내지 못하고 기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상대방의 얼굴과 말과 행동에 나타나는 미세한 변화를 금방 눈치챘다. 다른 사람이 무언가 필요한 상태라는 것을 무엇을 도와줘야 하는 상태라는 것을 알아챘다. 상대의 어려움을 느끼고 해소해 주려는 욕구가 앞섰다. 피상적인 관계보다 의미 있는 관계를 갈망했다. 나를 존중하고 알아주는 진실한 사람을 원했다. 그래서 타인의 어려움에 불쑥 발을 들였다. 그런 행동을 하면서 나를 진실한 관계라는 착각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간하지 못하고 설레발을 쳤다. 타인에게 도움을 주며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려는 의지는 자기희생으로 이어졌다. 연민이 과해서 남을 도우는 일에 자신을 소진시켰다. 나의 희생으로 타인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교만에 빠졌다.
타인의 반응에도 민감했다. 네가 왜 나를 그렇게 쳐다보는지, 네가 왜 나에게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네가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떠올리며 곱씹었다. 그만큼 상처받기도 쉬웠다. 경계선이 필요했다. 내게 필요한 자극을 선택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지 못했다. 금세 차오르는 감각의 용량을 알아차리고 비우지 못했다. 날카로운 만큼 마모되기 쉽고 섬세한 만큼 손상되기 쉽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에게 맞는 일과 환경, 사람들을 알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내가 나를 가로막고 발목 잡았다. 예민함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나를 맞추려고 했다. 내 특성을 탐색하고 수용하기보다는 타인에게 익숙한 이미지가 되려고만 했다. 나를 함부로 평가하기 이전에 그들의 평가를 의심해야 했다. 스스로에 대한 가혹한 평가를 멈추어야 했다. 그것은 나의 특성이었다. 이상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능력이었다. 정보나 경험을 깊이 처리하는 두뇌를 타고난 것이었다. 정보를 강렬하게 인식하다 보니 인지능력이 우수했고 남이 놓치는 걸 찾을 수 있어서 위험을 줄이고 창의적인 사고로 발전했다.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의사결정의 실수를 방지하고 문제를 해결했다. 타인에 대한 인식만큼 자기에 대한 인식도 뛰어났다. 타인의 말을 잘 듣고 이해하는 공감능력으로 인간관계의 호감도를 높였다. 민감하고 섬세한 감각은 협업을 이루고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바탕이 되었다.
예민함은 나를 성장시키는 동력이었고 주변을 풍요롭게 하는 강점이었다. 쉽게 대체될 수 없는 나만의 가치를 인정하고 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해야 했다. 세상사람들이 지질하고 보잘것없다고 손가락질한데도 마지막까지 내가 나를 끌어안고 받아들여야 했다. 남들이 갖지 못한 고유하고 독특한 특성을 가진 괜찮은 사람, 열정이 넘치는 감각적인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져도 되었다. 예측불가능한 삶에 예민함만큼 유리한 특성이 없다. 나에게 내린 정의를 새로 고치고 내 안의 가치와 보물을 탐구하고 건강하게 표출해야지. 온전히 나만의 색깔을 가꾸어야지.
사진출처:대전국제아트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