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어요?
음력으로 새해가 되었습니다.
저는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하나하나 늘어놓고 싶지만 그런 걸로 당신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정 듣고 싶으시다면 요 근래 있었던 즐거운 일 위주로 말을 전하고 싶어요.
저는 이제 즐겁고 따뜻한 얘기를 하려 합니다.
우선 저는 드디어 숙원 하던 냉장고 정리를 해냈습니다. 냉장고 안에서는 어마 무시한 것들이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곰팡이들을 제 손으로 치웠습니다.
괜히 모아둔 작은 소스들, 증정품으로 받은 마스크팩, 소분해두었던 무언가…언젠가 쓸 일이 있을까 싶어 모았지만 유통기한을 훌쩍 넘긴 채 부패되고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다 쓸어내고 냉장고 칸칸이 분리해 수세미로 박박 문질렀어요.
끈적이던 것들이 세제와 흐르던 물에 나 씻겨나가고 저를 누르던 답답한 것들도 다 흘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빨래건조대에 쌓아두었던 모든 옷가지들을 옷걸이에 걸어 잘 정리했습니다.
이 과정도 쉽지 않았어요. 빨래를 하고 방바닥도 쓸어 물건이 많아 조잡하지만 제 눈에는 깔끔한 방을 만들어냈습니다. 지쳐있지만 왠지 들떠서 장을 보러 나섰어요.
비워내고 나니 채우고 싶은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있었을 때처럼 밥을 잘 해먹고, 채소들을 섭취하려 장을 보니 사만 원이나 써버렸어요. 마지막으로 집에 돌아온 뒤에는 새 잠옷을 꺼내 입었습니다.
목이 늘어나거나 얼룩이 생겨 안 입는 티셔츠를 잠옷으로 두었는데 비싼 돈을 주고 위아래 세트인 잠옷을 사 입으니 나를 아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이 이제는 좀 편해졌나 봐요. 스스로 돌볼 시간도 의지도 생겼으니까요.
저를 돌보는 일은 참 행복했어요. 집을 가꾸는 것이 저를 돌보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 집이 좋습니다. 좁기는 해도 낡지는 않았어요. 제가 잘 꾸려간 내 집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굉장히 많은 시간, 집을 떠나고 싶어 했고, ‘유기견’이라는 별명처럼 집에 들어가지 않고 친구들 집을 전전했습니다.
저는 처음 이사 왔을 때 잠시 머물다 갈 줄 알고 토퍼 매트리스 하나에 앉은뱅이책상만 두었습니다. 임시라는 단어 아래 불편함을 감추고 살았습니다.
앉은뱅이책상에서 과제하고 밥도 먹으며 구부정해진 몸을 토퍼 매트리스에 두니 도수치료를 받아야 했고 잠잠하게 망가지고 있었어요.
좁은 집이 너무 싫은 만큼 어설프게 산 옷가지들은 많아지고 감당하지 못해 그저 옷 무더기를 방치해왔습니다. 좁은 공간, 큰 면적을 옷으로 만든 산에 잠식당하며 외면하고 현실을 비관하며 답답함만 느껴왔어요.
그런데 뭐 어쩌겠습니까 1인 가구, 등본을 떼어보면 내 이름 석 자만 있는 독립 상태. 내가 이 집의 가장인 것을…해결할 사람도 나. 살아야 하는 사람도 나.
책상, 침대, 옷가지를 정리할 장 어떻게든 들이고 깎고 잘 닦아내 내 것으로 만들고 잘 꾸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건 엉엉 울고 잊어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지!’라는 마음으로요.
방에는 이제 기타 한 대, 베이스 기타 두 대가 있습니다. 모아놓은 만화책도 드로잉 북도 쌓여있고 벽에는 아끼는 포스터로 가득합니다. 물건은 늘어 공간은 더 좁아졌지만 숨통이 트입니다.
이제는 이 집이 좋습니다. 이 집에서 보낸 시간이 아니었다면 저는 더 무르고 연약하고 낙관적인 이상주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집을 꾸리고 집은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제가 좋습니다. 이 한 문장을 말하기 위해 너무 장황한 말을 써내렸습니다.
잘 지내시나요? 저는 정말 잘 지내고 싶어요. 지난번에는 여기까지 말씀드렸는데 한 마디 덧붙이자면 ‘지금처럼요.’
사이버 러브레터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