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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샴스 Jan 26. 2024

사랑한다는 말

세계여행자 커플

체리가 나에게 처음 사랑한다고 말한 날, 우리는 이른 새벽 산길을 걷고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던 중이었다. 그날따라 길을 일찍 나선 건, 고지대에 있어 별을 보기 좋다는 지역을 걷던 터라 일찍 나가면 아직 떠있는 별구경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린 새벽 5시쯤 각자 머리에 헤드랜턴을 하나씩 달고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하늘이 뻥 뚫려있는 곳이 나오면 헤드랜턴을 동시에 껐다. 랜턴을 끄는 순간 머리 위로 떠있는 수많은 별이 눈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서로를 안고 빙글빙글 돌며 별을 구경했다. 우리의 낯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고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단 것에 감사했다. 눈앞에 북두칠성이 보였다. 북두칠성을 보다가 눈이 마주친 그와 키스를 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체리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나도 사랑한다는 대답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어색하고, 그 말을 해야 되는 순간이 오면 입이 굳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한 채 더 깊어진 키스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은 왜 이렇게 어려운지, 그건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유치원을 다닐 때쯤 엄마랑 은행에 간 적이 있다. 엄마는 순서를 기다리며 잡지를 보고 있었고 그때 난 막 한글을 떼고 있는 참이어서 잡지에 나오는 단어를 더듬대며 읽었다. 사, 랑, 해.

내가 그 단어를 읽자 엄마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내 눈이 향해있는 글씨를 보곤 말했다. "난 네가 웬일로 그런 말을 하나 했네." 그렇게 작을 때에도 난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하는 아이였나보다. 근데 엄마도 기억하는 한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고 그때 그 단어를 읽었던 순간이 엄마 앞에서 사랑한다고 말한 마지막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서로에게 한 번도 하지 않는 가족들과 자란 나는 체리와 만난 지 반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체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못 했다. 체리는 정말 사랑한다면 사랑한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것이며 넌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수도 없는 순간 걜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말로 뱉지 못할 뿐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하는 이유로 난 그를 대신할 무수한 바보 같은 말을 쏟아낸다.  타투샵을 지나갈 때면 내 몸에 체리의 이름을 잔뜩 새기고 싶다는 철없는 소리를 하고, 한국에 돌아가면 체리와 당장 결혼하겠다며 능청을 떤다. 네가 너무 좋아서 병이 날 것 같다고 말하고, 앞으로 네가 아니라면 난 비구니가 될 거라는 못 믿을 소리를 해댄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보다 죄다 쓸데없는 소리이고 사족이 붙는 말들이다.


체리는 모른다. 내가 많은 순간 얼마나 사랑한다고 속으로 속삭이는지, 그 말을 직접 입으로 내뱉을 타이밍을 잡으려 했다가 입을 떼지 못했던 적이 얼마나 많은지. 지금도 얼마나 그날을 위해 맘 속으로 연습하고 있는지 말이다. 오늘도 사랑스러운 그 애를 보며 사랑하려고 말하려다 실패하고선 너를 너무 좋아해,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도 속이 뭔가 안 풀린다. 이제 좋아한다는 말로는 내 속마음에 닿을 수 없어진 것 같다. 아마 조만간 너에게 그 말을 할 것이다. 사랑해 단 한 마디로 내뱉을 거다. 그러고 나서 앞으로 많이 많이 그 말을 너에게 해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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