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에 바다는 섬세하고 정성스러운 아내가 차린 아침 밥상 같다. 어디에 있어도 그다지 파도가 강하게 몰아치지도 않았고, 깊은 바다에서 느낄 수 있는 위험도 없었기에 에린은 그 강진의 바다가 좋았다. 에린은 토토가 언제 자기 곁은 떠날지 알 수 없지만 어디를 가든 토토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함께 해주고 싶었다.
사랑보다 강한 힘이 아직은 에린과 진수에게 있다면 그것은 우정이란 고운 탑이었다. 우정 앞에서는 친구 세윤도 에린에게는 전혀 질투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윤의 감정은 에린보다는 더 진수에게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에린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진수가 자주 강진에 내려오자 세윤은 자존심 때문에 서서히 에린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에린은 그런 세윤을 보면서 친구를 한 명 잃어버린 것 같은 아쉬움에 많은 가슴앓이를 했지만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토토가 그녀에게 친구와 같은 위로감을 준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사람보다 더 진한 사이는 아닐지라도 토토에게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주고 아픈 토토를 안아주고 병원을 데리고 다니고 하다 보니 이제 멀리 있는 세윤의 차가운 질투심보다는 토토가 에린에게는 더 위로가 되었다.
"에린아, 토토가 오래 살지 못해도 너무 아파하지 말고 보내주자, 그리고 토토가 살아있을 때 우리가 잘해주면 토토한테는 최고의 주인을 만난 셈 아닐까, 처음에 토토를 누가 그 좁은 신촌의 골목에 버리고 갔는지는 몰라도."
"고마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도 없고, 완벽한 선택도 없는 것 같아. 내가 지금 휴학하고 시를 쓰고 사진을 찍으러 토토랑 하루하루 강진에 사는 것이 완벽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이 선택도 나중에 그렇게 후회할 만한 잘못된 선택은 아닐지도 몰라. 진수야, 난 어쩌면 학교를 그만 둥지도 몰라. 이제 학교에서 배워서 세계 최고의 시인이 되고 싶다는 꿈은 내려놨어. 이제는 난 사람 그리고 동물들 나무들 풀숲에 피어난 풀꽃들..... 뭐 그런 것들에게서 배우는 게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꾸 해. 이러다 나 고졸될지도 모르지만. 그럼 어때. 이젠 학력위주 세상도 아닌데."
에린은 진심으로 자신의 변화를 진수에게 전했다.
"언제 바뀔지 아니면 영원히 네 생각이 그대로 일지 모르지만, 난 다 좋아. 너만 행복하면 에린아. 그리고 시인이 되는 건 참 좋은 거야. 시인들은 멋지잖아. 돈이나 세상 명예보다는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시인 아니니? 난 네가 그래서 좋은걸."
진수는 자신도 어쩌면 이 의대를 끝까지 다 마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자신의 선택에 강한 동기부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금은 아버지의 뜻이 더 강했기에 자신도 의대공부를 하다가 언제 그 선택을 내려놓을지 스스로도 다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이 한번 정한 길에서 물러서는 것을 원치는 않았다. 더구나 큰아버지에게 가끔씩 배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생각하면 자신에게는 크게 없던 의사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 같은 것이 왜 생겨나는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진수는 에린과 통화를 끝내고 자기 방에 있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라고 쓴 조그만 동판 글씨를 서서 읽기 시작했다. 큰아버지가 진수의 의대 입학 선물로 일부러 주문해서 제작해 만들어 주신 것인데, 요즘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제네바 선서'라고 써서 큰아버지도 '제네바 선서'라고 써서 보내주신 것이었다. 의대를 졸업할 때나 받는 것을 진수는 의사인 큰아버지가 일부로 미리 제작해서 주신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 이제 의업에 종사하는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이 순간,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선언하노라. ]
진수는 두 줄의 글자를 하나하나 뚫어져라 쳐다보며 자신이 한 이 선택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생애를 인류 봉사라는 거대한 틀에 넣고 생각을 하자 자신이 한없이 큰 사람 같아서 어쩐지 어깨가 우쭐해질 지경이었다. 진수는 자신이 어리기 때문에 이런 감정도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다.
1년 후,
에린은 광주에서 외할아버지의 사진 전시회를 열었다. 엄마의 마지막 유언처럼 되어 버린 외할아버지의 사진 전시회는 뜻하지 않게 에린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은 것이었기에 에린은 진수의 도움을 받아가면 대학에 휴학을 두 번이나 하면서 한 일 년 동안 그 일을 해나갔다. 정말 에린에게는 그 전시회 준비라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지를 처음으로 알게 된 일이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가 광주에서는 너무도 유명한 사진작가로 평생을 살았기에 몰려오는 인파로 전시회는 말 그대로 대 성공이었다.
그리고 전시회에서 외할아버지의 작품이 많이 팔려서 에린은 생각도 하지 못한 돈도 생겨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에린은 그 돈으로 외할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던 딸 엄마가 그리도 하고 싶었던 사진작가의 길을 가기 위해 광주로 이사를 갔지만, 자신은 외할아버지의 작품을 판 돈으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기로 했다. 프랑스에서 사진을 배우고, 시를 쓰면서 그에 청춘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에린은 프랑스로 떠나기 전, 외할아버지와 엄마의 납골당에 가보았다. 그리고 지난겨울 세상을 떠난 토토를 납골당에서 하는 수목장으로 치러줬던 나무에게 찾아갔다.
봄볕에 토토는 말없이 나무 그늘 아래 잠들어 있었다. 에린은 자신이 만든 나무 십자가를 조그마한 것을 그 토토의 뼈가 뿌려진 소나무 그늘 아래 세워주었다.
"사랑해 토토야, 잘 있어 토토야, 너 때문에 내가 참 행복했고, 넌 나의 위로자야, 네가 없었으면 토토, 난 못 일어났을지도 몰라. 아픈 네가 날 지켜준 거야. 엄마 돌아가시고 너 없었으면 난 아마 쓰러졌을 거야.
안녕, 이제 정말 잘 있어야 해. 나도 잘 갈게. 사랑해 토토, 고마워 토토."
에린이 토토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서자, 어디선가 봄바람에 꽃잎 하나가 날아와 에린의 머리카락에 붙었다. 그 푸른 보라색의 꽃잎의 이름은 물망초였다.
물망초 꽃의 '나를 잊지 마세요.' 란 꽃말이 에린의 탐스럽고 긴 머리카락에 붙어서 에린이 프랑스를 갈 때까지 그녀가 탄 비행기 안에서도 떨어지질 않고 붙어 있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