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여우, 고전古典 / 차분한 구성, 차분한 일러스트로 그려낸
★ 혹시라도 잊지 않으셨다면 끝내 좋은 인연이 될 테니, 낭군께서는 허락하시겠습니까? (<이생규장전>, p.73)
★ 그곳에서 턱을 괴고 잠시 눕더니 홀연 세상을 떠났다. (<취유부벽정기>, p.104)
★ 그러나 마치 둥근 구멍에 네모난 자루를 박는 것처럼, 저 자신과 세상이 서로 어긋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김시습 깊이 읽기> 양양부사 유자한에게 올리는 글, p.172)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김시습의 <금오신화>. 그 지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말이 많으나, 몇 백 년이 지난 지금도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단편집인 점은 확실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애절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를 담은 <만복사저포기>과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그리고 판타지 느낌을 물씬 풍기는 이계로 떠나는 <남염부주지>와 <용궁부연록>까지. 특색 있는 여러 전기(傳奇)와 함께 저자인 김시습과 관련된 일화들을 함께 다루었습니다.
김풍기 교수가 번역한 김시습의 <금오신화>입니다. 지금까지 <금오신화>의 번역본은 수 차례 나왔습니다만, 이번 번역본은 그 구성에 있어서 김시습과 금오신화를 처음, 혹은 오랜만에 접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로 구성에 있어서 장점에 해당하는 부분들이 꽤 많았습니다.
이번 현대지성의 번역본에서 가장 주의 깊게 볼 지점은 <금오신화>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사진과 일러스트가 다채롭게 삽입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그림 자료들이 이하 서술할 탁월한 구성과 더불어, 과하다는 인상 없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만복사저포기>의 맨 앞에 삽입된 만복사지의 사진이나, 김시습의 자화상을 책의 서두에 삽입한 사례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적재적소에 배치된 그림 자료들과 함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마치 문화재를 둘러보면서 <금오신화>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자연스러움을 느끼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또한 머리말 없이 바로 <금오신화>의 서사로 들어가는 구성이 눈에 띕니다. 김시습에 대한 소개나 책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설명하고, 책에서는 바로 <금오신화>의 첫 이야기인 <만복사저포기>로 들어섭니다. 독자들은 자신의 관점으로 있는 그대로의 고전을 접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문체 또한 읽기 쉽게 번역되어 있어, 고전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차분한 마음으로 <금오신화>의 이야기로 들어서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다섯 편의 이야기를 읽은 후 편찬자가 인용한 김시습의 일화들을 통해 독자들은 <금오신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하는 데에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해당 일화들은 독자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을 욕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p.181)는 묘사를 보면서, 그간 김시습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저 또한 김시습이라는 인물에 대해 호기심이 많이 생겼어요.
백 년 뒤 내 무덤에 무얼 적으려거든
꿈꾸다가 죽은 늙은이라고 해야 마땅하리라.
百歲標余壙 當書夢死老
-『매월당문집』 권 14 <我生> 중에서 (해제, p.224)
역자의 해제 마지막에 배치된 시는 번역본을 끝맺는 데에 있어서, 또한 저자인 김시습의 성격을 요약하는 데에 있어서도 탁월했다고 여겨집니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기에 적절한 현대지성의 번역본에서, 한시의 원문을 배치하여 깊이 있는 감상을 도모한 역자의 의도가 과연 잘 전달될지는 조금 우려가 되면서도, <금오신화>를 처음 접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있어서 이 번역본은 맨 먼저 권하고 싶다고 느낄 정도로 잘 번역된 판본이었습니다.
( * 해당 서평은 <금오신화> 서평단 활동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