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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Apr 06. 2021

나는 왜 아빠의 소주잔을 채워 주지 못했을까

04. 아빠 : 외로울 때 거칠어지는 사람들

아빠 : 아버지의 친근한 표현. 자식의 남성 부모이다. 가장(家長)으로 부르기도 하며 어떤 일을 처음 시작했거나 가장 발달시킨 사람에게 붙이는 사회적 호칭이기도 하다


인간은 반복적으로 겪어내는 사건들을 통해 일련의 공식을 만들어 낸다.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얻은 나만의 답들을 서랍 안에 차곡차곡 정돈해 나가는 것이다. 쌓인 데이터들은 체화되고 모르는 새 종교처럼 굳혀지는 관념들이 생긴다. 무섭지만 그것이 모든 일의 서막이다. 스스로 쌓아 올린 작은 성에 갇히는 일.


옳고 그름이 맛 좋게 버무려져 진실을 분간해내기가 힘든 문 밖의 세상에서, 직관력 하나로 삶을 버텨내던 내가 늘 주문처럼 외우던 말이 있다.

‘99%의 확신이 있어도, 내가 간과하고 있는 1%의 사각지대가 존재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매 순간이 편견 없는 유연한 사고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던 직관력의 싸움이었다.

1%에 걸었던 무모한 희망들이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화살이 되어 등에 꽂히는 날들이 늘어갔지만, 차라리 그런 도박이 잔인하리만큼 명중하는 직감보다 낫다는 생각에 선택한 방어기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갈림길에 선 순간마다 나는 늘 그 하찮고 작은 희망을 선택했다.




우리 아빠는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사업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빈손으로 시작한 일이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자 엄마를 만나 결혼을 했고 나를 낳았다. 가난한 시골집의 여섯째로 태어난 그는, 한 지붕 아래 북적대며 사는 삶을 벗어나 도시로 나가는 것만이 돈을 벌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 첫 실패는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동업자를 믿고 투자했던 원양어선 사업이었다. 결혼 전 모아둔 돈을 거의 날렸을 즈음 내가 태어났는데, 물정 모르는 나를 두고 주저앉을 수없게 되자 구입한 책으로 러시아어를 독학하고 그 나라에서 큰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얼마 뒤 소련이 붕괴하면서 별 소득 없이 귀국하게 되었지만, 이제 막 걷기 시작한 나를 보면서 다시금 재기를 다짐했다고 한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잠시 얹혀 지내던 외갓집에서 분가해 본격적으로 도시에 정착을 시작했다. 눈 뜨자마자 티브이를 켜는 게 습관이었던 내가 아침 지역뉴스에서 아빠를 발견한 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2평도 안 되는 조그마한 사글셋방 구석에 놓인 중고 티브이 안에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아빠가 앵커와 마주 보며 인터뷰를 하고 있다. 놀라 묻는 내게 엄마는 그가 지역에서 꽤 큰 재개발 사업의 대표직을 맡았다고 말했다. 나는 그 당시 너무 어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티브이에 나오는 아빠는 내 생각보다 신기하고 대단한 사람인 듯해 보였다.


재개발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다가, 여러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었을 때 가능한 사업이라는 걸 알만큼 컸을 때는 우리 집도 외각 쪽의 작은 임대 아파트로 이사를 한 뒤였다. 중학생 답지 않게 애어른 같다는 말을 곧 잘 들었으나 술을 거르는 날이 없는 아빠의 고달픔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는 못했다. 원망하는 것으로 시간을 버리는 대신 새벽 늦게까지 소란스러운 거실을 외면한 채 방 안에서 공부를 했다. 반에서는 늘 1,2등을 다툴 만큼 시험 점수와 공부에 집착했다. 아니, 나는 그때부터 몰입에 집착했다. 나에게 공부를 하는 것은 단순히 학교를 가고 책을 읽는 것을 넘어 세상과 나를 단절시키고 몸을 숨길 수 있는 나만의 우주를 만드는 일이었다. 나를 무력하게 하는 것들에서 벗어나 온전히 내 손으로 건설하는 일들은 내가 쾌락과 권력을 쥐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생존수단이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시작된 서울 자취생활이 쉽지 만은 않았다. 시키는 대로 해오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 어떤 룰도 없이 내 인생을 스스로 구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한계 없는 자유만큼 혹독한 책임이 뒤따르는 전혀 다른 차원의 두려움이었다.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들은 굳건했던 세계관에 또 다른 문이 열리는 경험들로 잦은 혼란을 주었다. 그것은 내게 명치에서부터 목 끝까지 설렘으로 가득 차는 일임과 동시에 편협하게 결론지어져 보관 중인 과거에 대한 죄의식으로 고통스러운 각성의 연속임이 분명했다.




수업이 끝나고 쏟아지는 폭우에 정신없이 뜀박질하다 서대문에서 유명한 두부김치 집 앞에서 잠시 비를 피했던 날, 처음으로 아빠의 소주잔을 채워 주지 못했던 과거의 내가 미워 한참을 엉엉 울었다. 집으로 오는 내내 비와 눈물이 섞여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흠뻑 젖었지만 더 이상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그 눈물이 무슨 의미였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마 나는 그가 좌절과 실망을 감내해야만 하는 순간들에 진정으로 마음 둘 사람 하나 없다는 게 얼마나 외로웠을지, 파도처럼 밀려와 본인을 잠식해버릴 것만 같은 그 감정들을 처리하는 방법을 몰라 술로 도피해야만 했던 일들이 얼마나 처절했을지, 아빠가 안주로 좋아했던 두부김치 냄새가 풍기는 그날 끝내 외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빠는 가끔 외롭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때마다 아빠를 안아주지 못했다.

아빠도 누군가의 아빠가 되는 것은 처음이다.

아빠도 아빠이기 전에 사람이다.

사람은 서툴다.


아빠는 성공에 목말라 있던 사람이었다. 사람을 좋아했고 가족에 충실했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땐 자주 외로웠고 술에 취해 사는 것으로 결핍을 외면했다.

외면은 또 다른 중독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아빠를 성숙하게 다독이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술 먹는 아빠를 다그치고 오랜 기간 미워했다. 근본적인 원인을 볼 줄 모를 정도로 어리숙 하지는 않았으나 누구에게나 그렇듯 외면은 나에게도 쉬운 선택이었다. 이번에도 진실을 향하고 있는 직감은 무시한 채, 허울 없는 희망을 선택하면서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는 별 것 아니라고, 다른 이들 삶과 별 다를 바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가족들의 서툶이 의도와는 달리 상처로 돌아올 때가 있다. 옆집 아저씨가 아니라 우리 아빠이기에 더 상처가 되는 순간들. 그 서툶이 내가 가진 것과 다를 게 없다고 느껴질 때 비로소 포용이 가능해지고, 우리는 조금 더 여유로워진다. 아빠는 외롭고, 서툴다. 그가 외로움을 해소하는 방법은 잘못되었으나 자신의 상처를 능숙하게 돌보지 못하는 서툶을 비난할 수없다. 그 또한 모든 것이 처음일 테니.

상처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그뿐이다. 상처와 사실을 분리할 수 있는 객관성을 기르고 각자가 가진 한계와 자기 방어기제를 존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표면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쓰는 에너지를 줄이고 내면의 평화를 가질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여정은 상대의 서툶을 가엾고 어여삐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연민’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상대가 아닌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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