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 니체와의 첫 만남
니체를 처음 만나다.
‘신은 죽었다, 걸리면 죽는다.’는 광수 생각의 화장실 낙서 그림이 먼저 떠오른다.
그냥 ‘신은 죽었다’는 극단적 표현이 강력하게 뇌리를 스친 명언이라, 그저 니체는 좀 많이 삐딱이겠거니 싶었다. 그래도, 니체의 책을 집어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제야 읽을 때가 된 건지, 이제는 나랑도 취향은 맞아서 인지, 세상을 좀 비판적 관점에서 봐야 하니, 이 시대에 다시 급 부상하고 계시는 니체 님의 인기에 실려 나도 같이 책을 읽어 가고 있다.
니체를 만난 지 벌써 2주 차가 지났다. 첫날은 이게 무슨 말씀이신지. 니체 님을 원망해 보고, 둘째 날은 니체 님의 말씀을 못 이해하는 나를 질책해 봤다. 며칠 읽어 내려가며, 몇몇 문장이 와닿기도 하고, 몇몇 문장들은 반감도 들었다. 이래서 고전 철학서는 해설서가 필요한가 보다. 도움을 받으면 확실히 수월하게 읽어 내려갈 용기가 나지 싶어, 열심히 유튜브도 검색하고, 관련 해설서도 찾아 읽게 된다.
책 한 권을 읽기 위한 준비운동이 이렇게나 거창할 수가. 지난 주말에 들려 인문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만난 니체 해설서 [마흔에 읽는 니체], [니체의 말] 등을 보니, 참아 웃음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니체가 웬 말인가?’ ‘요즘 우리에게 니체의 철학이 다시 필요해진 이유가 무엇일까? 나야 뭐 자진해서 고른 책이 아니라 북클럽에서 함께 읽고 있으니, 멀찌감치 떨어져, 시대적 트렌드를 관찰하는 입장에서 니체를 다시 만나보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궁금하기는 하다. 사실, 왠지 니체의 책이 진정한 자기 계발서 원조가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다. 무엇을 극복하라는 것인지, 무엇을 창조하라는 것인지. 나 스스로를 믿으라는 메시지는 강력했다.
ChatGPT와의 협업,
왜 니체의 철학이 이 시대에도 인기가 있는 걸까?
이왕 내친김에, Chat GPT에게 물어봤다. 니체를 처음 만난 바로 그 시기에 Chat GPT와의 첫 만남도 이루어졌으니. 같이 공생하며, 니체를 알아가 보고 싶어 졌다. Chat GPT가 생산해 낸 글이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 어디까지가 생각의 공유라 말해볼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이지만, 요즘 핫한 이와 함께 일단 협업해 봤다. 아직 시작에 불과하지만, 지난 몇 주간 세간의 관심을 받아들이고 있는 Open AI의 인공지능 챗봇 ‘ChatGPT’와의 대화는 과히 놀라웠기 때문이다. 2주 전 연구 미팅에서 신기한 매직을 보여주겠다던 동료의 ChatGPT시연 현장에서의 나의 반응이 아직도 기억난다. 우리가 몇 날 며칠을 머리 싸매고 논의했던 이슈를 단 몇 초 만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휘리릭 써내려 놓은 답안은 과히 놀라웠다. 물론 논리적 허점을 애써 찾아보지만, 훌륭한 연구자원이 되기에 충분한 밑거름은 되었다. 첫 번째 들었던 느낌은, 이거 뭐지? 내가 쓴 글보다 훨씬 나은데. 잘 활용해 볼 수 있겠네. 그런데 금세 두 번째 질문이 몰아쳤다. 모두가 이 챗봇을 써서 연구를 하면 어쩌지?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신문에서 매거진 기사에 특별 칼럼까지 샅샅이 소식을 찾아 읽고 있는 요즘이다. 이를 알고, 정말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복받쳤다. 놀라움, 부끄러움, 걱정, 안도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래도 ChatGPT가 이야기해 주는 보편적인 대답도 들어보고, 진정 내면에서 들여오는 나의 물음들에 대한 심도 싶은 대화를 인공지능과 해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네 가지의 간단 복잡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첫째, 왜 이 시대에 니체의 철학이 인기가 있는 걸까?
둘째, 니체가 주장한 ‘신은 죽었다’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종교에 대한 비판인가? 비유적 표현일까?
셋째, Thus Spoke Zarathustra의 핵심 가치는 무엇일까,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생각해 봐야 할까?
넷째, 'Thus Spoke Zarathustra의 핵심 가치는 이해하기 위해 독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첫 번째 질문만 간략히 소개해 보면, ChatGPT가 제시해 준 니체 철학의 묘미는 ‘개인주의’, ‘도덕성’, ‘삶의 의미’에 대한 현대 이슈와 매우 관련이 높기 때문이며, 종교와 전통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담고 있기도 하고, 인간의 의지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에 대한 신선함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니체의 글쓰기 스타일이 격언이나 잠언처럼 체험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 형식인 ‘아포리즘’이 라 대중들에게 쉽게 읽히기 때문이라 한다. 이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 와 존재론적 가치가 현시대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니 이보다 더 구체적인 답변이 있을까 싶다. 이처럼 다양하고 종합적인 이유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는 이분께 감사의 뜻을 전해본다.
그냥 한번 어필해 보지만, 나도 이런 답변을 진작에 생각해 보고, 추측해 보고 있었다. 먼저 생각해 냈던 답안들이 거의 다 있다. 그래도, 인공지능이 더 일목요연하게 내 마음을 꽤 뚫어 본 듯하다.
하지만, 누가 믿어주겠는가? 아니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이 누구 머리로 나왔는지, 실제로 누가 썼는지. 어쩌면 이미 공공연한 만인의 지식으로 쌓여 있던 것을 내가 잠시 빌렸을 뿐인데.
그냥 일단 공저로 해두자.
차라투스투라의 군중이 되어보자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만약, 내가 차라투스트라 앞의 군중 중의 한 명이었다면, 그의 말이 어떻게 와닿았을까?
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 나의 형제여, 창조의 뜻을 품고 그대의 사랑과 더불어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정의가 뒤늦게 그대의 뒤를 절뚝절뚝 따라갈 것이다. (p.84)
베푸는 덕에 대하여: 나의 제자들이여! 나는 이제 홀로 길을 떠난다. 그대들도 이제 제각기 홀로 이곳을 떠나라! 나는 그러기를 원한다. (101page)
만약, 내가 차라투스트라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무엇이 궁금할까?
아마도, 한 명의 현인보다는 집단 지성(군중?)을 선택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니체의 철학이 내게도 와닿는 걸 보니,
나도 그 옛날이었다면, 군중의 하나였지만, 그래도 언젠가 ‘창조하는 인간 중 하나’가 되어보려 노력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