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 브라이언 에븐슨
[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는 작가 브라이언 에븐슨이 한국에서 최초로 선보이는 단편 호러 소설집이다. 브라이언 에븐슨은 교묘하게 현실을 뒤틀고 기이한 생명체를 창조하면서 독자들을 자신만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의 이야기는 압도적인 몰입감과 함께 독창적인 충격을 선사하며 섬뜩한 공포를 보여준다.
브라이언 에븐슨은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등 각종 언론 및 문학잡지에서 주목하고 있는 호러 작가로, 단편 소설 [두 형제]로 1998년 오헨리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도 2019년에는 설리 잭슨상을, 2020년에는 월드 판타지 어워드를 수상하면서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는 그의 단편 호러 소설 22편을 수록하고 있다. 짧지만 흡입력 있는 각각의 이야기는 자꾸만 서늘해지는 목덜미를 몇 번이고 더듬게 만든다. 단편 소설집이지만 쉽게 책을 덮지 못할 것이고, 완독 후 책을 덮었을 땐 한 번에 몰려오는 섬찟함이 주변 공기를 차갑게 만들 것이다.
단편 소설은 장점과 단점이 확실한 소설의 형식이다. 짧은 이야기는 순간적인 집중력을 높이고, 독서를 용이하게 만들어준다는 장점이 있다. 짧은 이야기 안에 기승전결을 전부 담아야 하기에 작가의 역량이 확실하게 돋보인다는 것도 장점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작품에 따라 단점이 될 수도 있는데, 독창적인 소재와 흡입력 있는 전개가 부족할 경우에는 독자의 흥미가 쉽게 떨어질 수 있다. 어차피 단편이기에 다음 편으로 넘기는 것에 대한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또한, 장편 소설처럼 차근차근 서사를 쌓아갈 수 없기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야기의 서사를 풀어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설명이 부족할 경우, 소설의 모든 설정을 독자에게 이해시키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렇다면 무려 22편의 단편이 수록된 [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는 어떨까.
브라이언 에븐슨은 독창적인 소재로 단편 소설이 가지는 어려움을 완벽히 보완하고 있다. 그는 상당히 폭이 넓은 소재를 다루고 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특화된 작가인 줄 알았는데 SF식 호러도 능숙하게 다룬다. 더불어 강박과 집착으로부터 비롯된 편집증을 통해 현실과 꽤나 가까운 호러도 연출해 낸다. 독자로 하여금 지루함 없이 공포의 세계를 유영하도록 만든다는 말이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다양한 형태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몸을 노리는 우주 괴물이 나오는가 하면, 이미 망해버린 세상 속에서 적응하고 진화하며 공포 그 자체가 되어가는 존재들이 있다. 완벽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촬영지를 되찾았다가 무언가를 마주치는 이도 있고, 편집증에 사로잡혀 결국 총구를 이웃에게 들이대는 이도 있다.
브라이언 에븐슨은 독자조차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현실을 조각내고 그 틈으로 강박과 집착을 흘려보낸다. 그렇게 흘러든 강박이 결국엔 세계를 박살내고, 부서진 파편이 손끝에 박힐 때 비로소 독자들은 공포를 느낀다.
교묘하게 비틀린 현실이 두려워서 작정하고 만들어진 세계의 이야기를 듣는 걸 선택해도 결말은 똑같다. 그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은 이미 부서져 있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인간이었던 것들은 점점 사라져간다. 그 끔찍한 광경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 역시 사라질까 두려워진다.
길이가 짧다는 단편 소설의 특성은 독창적이고 다양한 그의 소재를 더욱 빛나게 만든다. 쉬지 않고 몰아치는 각기 각색의 일그러진 세상은 계속해서 독자를 유혹한다. 부서지는 세계를 따라 같이 파멸하자고. 순식간에 끝나버린 그 파멸은 또 다른 파멸을 향해 손짓하고, 순식간에 끝나버린 붕괴가 못내 아쉬워 다음 붕괴를 향해 가다 보면 어느새 소설집이 모두 끝나버리는 것이다.
브라이언 에븐슨의 소설은 충분히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매력적인 소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진정한 공포일지도 모른다.
[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가 단편 소설집이라서 가지는 아쉬움도 분명 있다. 장편 소설에 비해 기승전결을 담을 분량이 현저히 적은 단편 소설은, 최소한의 정보로 최대한의 서사를 풀어내는 것이 관건이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부지런히 작가가 심어 놓은 정보를 주워가며 이야기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브라이언 에븐슨의 소설은 친절한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배경과 인물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고, 상황에 대한 묘사 또한 충분하지 않다. 불친절하게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설정을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 또한 어렵다. 정확한 배경을 떠올리기가 어려울 때도 있고, 설사 상황을 추측하는 것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상상에 의존해야 하는 부분이 다수 존재한다.
‘당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려 드릴 수 있지만, 당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에 수록된 ‘얼룩’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대사이다. 이 대사야말로 [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를 잘 표현하는 문장이다. 브라이언 에븐슨은 독자들이 읽고 있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고, 왜 무서운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 주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부분이 공포심을 더욱 자극한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 하나는 탁월하게도 풍부하다. 대부분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독자와 마찬가지로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이 느끼는 불안은 고스란히 독자의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등장인물과 함께 공포에 떨며 조그마한 단서로 상황을 추리하고 있으면, 성큼 다가온 두려운 진실을 목도하고야 만다.
상황에 대한 주권을 쥐고 있는 등장인물의 심리를 안다고 해도 두려움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 으스스한 주변 상황과는 다르게 침착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보여주는 대비감은 오히려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부족한 설명과 불친절한 전개가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고,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까지 무섭지 않다. 진정한 공포는 무지로부터 온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어렴풋이 보이는 어둠 속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브라이언 에븐슨은 최소한의 정보로 독자를 유인하고, 그들이 스스로 어둠의 영역을 넓히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어둠이 기어이 독자를 덮칠 때, 그는 이야기를 끝낸다.
현실과 비현실. 그 둘을 절묘하게 넘나드는 브라이언 에븐슨은 단편이라는 형식까지 이용해 독자들의 허를 찌른다.
[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는 그야말로 방심할 수가 없는 호러 소설이다. 한 편의 소설이 끝나고 미처 숨을 돌리기도 전에 다른 소설이 몰아친다.
수록된 여러 단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을 몇 가지 추천해 보겠다.
우선, ‘두 번째 문’이라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 있다. ‘두 번째 문’은 우주선으로 추정되는 공간에서 언니와 함께 지내며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러 가지 갈래로 뻗어나간 추측이 결국 한 가지 결론으로 도달할 때 느껴지는 공포가 인상 깊었다.
‘룸 톤’이라는 작품도 인상 깊었다. 최고의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촬영지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은 영화감독에 대한 이야기이다. 촬영을 마친 후 어느 한 부분에 대한 집착을 멈추지 못한 그가 결국엔 어떠한 일을 저질러 버리고 마는데, 그 과정이 상당히 건조한 문장으로 진행된다. 버석한 진행 덕에 그가 저지른 일의 끔찍함이 좀 덜하게 느껴지는데, 그걸 깨닫는 순간 느껴지는 음습함이 충격적이었다.
마지막으로 ‘구멍’이라는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인간의 몸을 노리는 어떠한 우주 괴물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는 섬뜩한 얼굴로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등장인물이 놓인 상황이 너무나도 절망적이라 어느새 그와 함께 궤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순간 오싹함이 느껴진다.
호러 소설이라고 해서 피가 낭자하고 날붙이가 만연한 소설을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브라이언 에븐슨의 이야기는 그렇게 직관적인 공포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결말에 이르러 무언가를 깨달아야만 느껴지는 소름 끼치는 공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2024 새로운 호러를 원한다면 [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를 선택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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