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이지만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도와준 사람에 대해 안심이 되기도 하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원칙도 있습니다. —사도 20:35.
왜 그렇게 돈을 벌려고 하느냐고 하면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고 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대답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많은 종교단체에서 하는 자선활동이나 사업도 많으며 국가차원의 그런 성격의 복지제도도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인간이 하거나 해온 선행들은 셀 수 없죠.
그런데 그러한 모든 것들이 전혀 인정이 안 될 수 있습니까?
에스겔 18:24입니다.
‘그러나 의인이 자기 의를 버리고 그릇된 일을 하며, 악인이 저지르는 모든 혐오스러운 일을 한다면, 그가 살겠느냐? 그가 한 의로운 행동들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저지른 불충실한 행위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마태 7: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악귀들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기적을 많이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을 전혀 알지 못하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여, 내게서 물러가시오!’
소위 자의적인 선행으로 보이는 것들은 진정한 선이나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혐오스러운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하는 공식적인 살인들도 그에 포함되는데 90% 이상의 인간들이 그에 가담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사적으로 어떤 선행을 하였건 그들은 죽어 마땅한 혐오스러운 존재들이며 모든 종교인들이 그렇습니다. 일선에서 살상행위를 하는 자들의 상당수는 종교에 소속되어 있죠.
종교 자체가 가장 혐오스러운 집단입니다. 선행이라는 것을 아무리 많이 했어도 이점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할 수 있고 사람들을 위해 연주를 하는 등의 온갖 선행을 할 수 있지만 사실상 무가치한 것입니다. 위선적인 기도를 아무리 열렬히 한다 해도 그렇습니다. 어떤 고상하게 보이는 행동도 그렇습니다.
곧 멸망할 세상에 그대로 속해 있으면서 제 아무리 살신성인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예수도 배고픈 사람들에게 기적으로 음식을 나누어 주는 그런 선행에 해당하는 행동을 했지만 그것에 별 가치를 두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유익한 행동을 했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음식을 얻어먹은 사람들도 진정한 유익을 얻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침몰할 운명의 배안에 있다면 유일한 선은 그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경고를 발하고 그렇게 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올 사람들이 다 나왔다면 그 경고를 무시하고 그 안에 남아 있는 어떤 사람도 그리고 그 어떤 선행도 무가치합니다.
반면 지금까지의 삶과 행동이 아무리 처참했다 해도
에스겔 18:21,23, 27,28입니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지은 모든 죄에서 돌아서서 나의 법규를 지키고 공의롭고 의로운 일을 하면, 그는 반드시 계속 살 것이다.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가 저지른 범법 행위 가운데 어느 것도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한 의로운 일 때문에 계속 살 것이다.’
‘내가 악인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기뻐하겠느냐?’ 주권자인 주 여호와의 말이다. ‘그가 자기의 길에서 돌아서서 계속 사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악에서 돌아서서 공의롭고 의로운 일을 하면, 그는 자기 생명을 보존할 것이다. 그가 깨닫고 자기가 저지른 모든 범법 행위에서 돌아선다면, 그는 반드시 계속 살 것이다.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