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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나 Mar 07. 2022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모두에게 보내는 편지

변화를 기다리고 저항하는 여행의 시작과 끝에서


나중에, 아주 나중에 책 한권 쓰게 된다면 앞에 적고 싶은 문구가 있어.
풍성한 삶을 살게 해주신 나의 하늘의 아버지와 땅의 부모님에게 - 이 길이 출발하는 길인지, 떠나가는 길인지, 돌아오는 길인지는 몰라도 도착지만은 알기 때문에, 나는 이미 기뻐하고 자유할 수 있기 때문에.

어때? 지금은 맘에 드는데 몇 년 뒤에 보면 또 어떨지 모르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길을 잃었던 공항은 이스탄불 공항이야.

초등학생이었나, 꽤 어렸을 때 엄마, 아빠, 언니와 기념품 가게를 구경하고 있었어. 이륙 소리를 내는 비행기 열쇠고리에 정신이 팔려 귀에 가까이 대고 버튼을 눌러보고 있었는데,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는 거 있지? 이러다 공항 미아가 되는 건 아닌가,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하는 건가, 의자에 쪼그려 자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주위를 서성거렸어. 나를 찾는 방송이 나올까 싶어서 귀 기울이면서 말이야 (그 와중에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할지, 틀린다면 어떤 식으로 틀릴지, 혹시 내가 못 알아듣진 않을지 걱정도 했어). 바쁘게 걸어 다니다가 나름 정신을 차리고 티켓에서 본 게이트를 찾아 가는데, 뒤에서 “00아!”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뒤돌아보니 가족이 일렬로 쪼르르 서서 날 기다리고 있었어. 아직도 엄마와 언니는 내가 누가 봐도 '나 길 잃었소'하는 표정과 불안 가득 찬 눈빛으로 두리번거렸다면서 놀려. 이스탄불, 나리타, 도하 등등 꽤 많은 공항을 거쳤지만 아직도 공항은 새롭고, 긴장돼.


얼마나 긴장하냐면, 히스로 공항에선 안경을 손수 쓰레기통에 버리고 왔어. 처음으로 한국에서 발급받은 체크카드를 한국이 아닌 나라에서 사용했을 때었어. 레이오버 동안 굶지 말고 뭐라도 먹으라고 엄마가 신신당부해서, 숙제처럼 샌드위치 가게에 가 빵과 커피를 신중하게 골랐지. 외국인 미성년자 신분으로는 카드 만들기가 복잡해 주로 현금 결제만 했던 게 문제였는지 난 카드 하나 쓸 줄도 몰라 단말기에 그냥 대보고, 옆에도 긁어보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어. 보다 못한 직원이 카운터 뒤에서 몸을 쑥 내밀더니, 카드를 집어서 구멍에 쓱 넣고 알아서 계산을 했어. 민망해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났어. 나름 맛있게 먹고 어찌어찌 비행기를 타고 보니 안경이 없는 거야. 일어나서 의자를 한 번 보고, 가방 깊숙이 손을 집어넣어 한 번, 두 번 휘저어 보고, 한 20초 지났나, 어디 뒀는지 생각이 나서 헛웃음이 피식 나오더라. 누구한테 말하지도 못하고 혼자서 키득키득 웃었어. 빵 들어있던 종이봉투에 잠깐 넣어 놓고, 음식만 꺼내 먹고, 그걸 통째로 버린 거야. 이미 비행기 탔는데 어떡하냐. 당분간 맨 첫 줄에 앉아서 수업 들어야지.




나는 변함없이 오랫동안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거의 없는 편인데, 어둡고 비가 추적추적 오는 새벽에 공항 가는 길은 아직도 싫어해. 딱 그런 새벽에 - 출발하기 5분 전에 - 가방에 여권이 없다는 걸 발견한 적도 있어. 기적처럼 찾았다? 방학 때 기숙사 짐을 다 싸서 지하 창고에 보관하는데, 거기 평소에 안고 자던 초밥 모양 인형을 내려놨었거든. 계란 부분과 밥 부분 사이에 끼어있었어. 왜 거기 고이 수납되어있었는지, 뜬금없이 인형 속에 손을 집어넣고 "헉 I found it!" 소리 지르는 나를 보는 기숙사 선생님 눈빛이 안도였을지 '재는 왜 저러냐'였을지, 나는 도대체 거길 볼 생각을 왜 했는지... 참 행운이었지.


요즘은 공항이 좀 그리워. 검색대니 출국심사니 복잡한 부분 다 통과하고 게이트 앞에서 마지막 카톡을 보내는 시간을 좋아해. 주위에 출국 스케줄이 겹친 유명한 사람은 없는지, 왜 한국사람들은 유독 일찌감치 줄을 서는지, 내 옆에 앉을 사람은 누구고 말을 걸면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상상하는 시간도 좋아하고, 비행기에서 따듯한 물수건이랑 기내식 메뉴를 받아보는 시간도 설레고, chicken or lamb?을 물을 때 역시나 닭 메뉴가 안전할지 오늘은 느낌대로 모험을 할지 고민하는 시간도 나쁘지 않아. 단거리 비행기에서 승무원이 직접 구명조끼를 써가며 하는 안전 안내를 보는 것도 재밌고, 땅콩을 줄지 프레젤을 줄지 기대하기도 해. 어렸을 때는 딱딱했던 안전 수칙 영상도 요즘에는 나름 재밌는 편이고, 장거리 비행기에서는 타자마자 이어폰을 끼고 무슨 영화가 있는지 쭉 훑어보는 것도 습관이 됐어. 물론, 이륙을 하든 말든 바로 담요 위에 벨트를 하고 안대를 쓰고 잠들 때도 있지만.


난 “어디로 가는 과정”과 애증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차를 10분만 타도 멀미를 하는 편이고, 아직도 가방이나 여권 검사할 때마다 머릿속으로 온갖 시나리오를 짜보는 편이야. 비행기 타기 전날부터 속이 쓰리고, 출발하는 새벽에 위경련이 와서 손발을 따고, 입출국 심사나 비자 심사 때 어떤 질문을 받을까 머릿속으로 리허설도 서너 번 해보지. 한국 여자 두 명이 왜 요르단에 가냐며 이상하다고 'that’s not normal'이라는 캐나다 심사관도 있었고, 독일 슈바르츠발트 멋지지 않았냐며 'auf weidersen'이라고 인사하는 미국 비자 심사관도 있었고, 여권이 읽히지 않아서 거의 울먹거리는 나에게 한국사람이 한국에 왔는데 어떻게든 해야죠, 라며 위안을 주던 심사관도 있었어.


[미국 비자하니까 생각나는데, 심사 전날 잠을 설쳤어. 세 번 넘게 확인했는데도 서류를 조금이라도 잘못 작성해 돈도 날리고 미국에 못 가는 건 아닐까, 사서 걱정하는 편이라. 아침부터 2 시간 넘게 줄을 서서 잔뜩 힘이 들어간 몸으로 조심히 대사관에 들어갔어. 긴장한 게 최대한 티 나지 않도록 여유로운 표정을 연습하면서 말이야. 실수하진 않을까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또박또박 대답하는 동안 심사하시는 분은 내가 미국에 발 디딜 자격이 있는지, 앞으로 내 가깝고도 먼 미래의 계획에 대한 결정권을 손에 쥐고 있었지.]


여행의 과정 자체는 아무 데도 속하지 않은 그 중간을 즐기는 일이라면 여행의 시작과 끝은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올 자격이 있는지, 있어야 할 곳에 있는지 입증하는 일이잖아. 가뜩이나 차 막혀서 늦었는데 체크인 데스크에서 내가 과연, 정말, 예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도 되는지 온갖 서류를 확인해야 하는 바람에, 보안검색대 통과 후 신발을 도로 신지도 못한 채 막 뛰어간 적도 있어 (물론, 지금은 여행금지국이니 먼 옛날이야기). 요르단이나 예멘에서 미국으로 갈 때는 주로 특별 보안 체크를 해야 한다는 티켓을 발급받았고, 모든 체크 포인트에서 따로 불러내어저 흰 장갑을 낀 보안요원이 내 필통을 뒤지고 속옷을 들춰본 적도 있어. 첫인상도 중요해. 독일에 갈 땐 독일 비자카드를 꺼내서 먼저 내밀고, 예멘에 갈 땐 예멘 비자 페이지에 티켓을 꽂아서 내밀고, 미국에 갈 땐 학생비자 종이를 준비해서 들고 있어. 난 여기 올 자격 있다고. 길 잃은 거 아니고, 내 자리가 여기고,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다고.


미국에 도착한 둘째 날, 유학생 담당 선생님이 여권과 I-20 비자 서류를 보관하라며 반투명 플라스틱 폴더를 건네주셨어. 이 지역에 토네이도가 꽤 자주 오는데, 몇 년 전에는 기숙사 하나를 통째로 쓸어버린 적도 있데. 그러니까, 경보가 울리고 1층에 창문이 없는 좁은 공간으로 대피할 때, 다른 건 다 두고 가더라도 이건 챙겨가라는 거야. 난 우산도 소용없는 날씨에 비에 쫄딱 젓은 채로 집까지 걸어왔다가 다시 또 학교로 간 적도 있어. 와서 그 폴더 챙겨가려고.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건물이 무너지고 내가 발견됐을 때 그 파란색 폴더를 품 안에 꽉 쥔 채로 있어야 머리 아플 일 안 생기는 거야.


이것마저 유효기간이 따라오는 정체성인걸. 20년 6월 15일 자정이 지나면 나는 더 이상 이 종이에 있는 내가 아니고, 내가 속하지 않은 곳에 있다고 얘기하는 수많은 눈길로부터 이 종이는 나를 지켜주지 못해. 미국에서 마지막 몇 개월은 불안감도, 기대도 없었어. 회사와 계약이 끝나고 새로운 직장을 한 달 이내 찾지 못하면 나라를 떠나야 하는데, 회사는 처음엔 3개월씩, 1달씩 계약을 연장하다가 나중에는 기간도 없이 일단 계속 일하라고 하더라. 언제까지요?라고 물었을 때, 코로나 때문에 확답을 줄 수 없다고 했어. 처음에는 계약 종료일 한 달 전부터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비자는요? 묻다가 나중에는 묻지도 않았어. 일이 진행되기 위해선 끊임없이 답을 요구하고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들었지만, 사실 난 간절하지 않았던 것 같아. 내 자리가 아닌 곳에서 내 자리를 만드는 일이 이렇게 오롯이 남에게 달려있는 의존적인 과정이라니, 쟁취하기 위해 나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요구해야 한다니, 계약 연장이 왠지 엄청난 자비를 받은 듯한 느낌이어야 한다니. 귀찮음도 분명 있었지만, 나의 능력과 가치를 스스로 믿지 못하는 마음도 역시나 컸어.


주말 사이에 해고 당하는 디자이너 동료들을 보며 나는 미련 없이 떠날 준비를 했어. 그저 수많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내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야 된다면(go back to where you came from), 이제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돌아간다는 건 무슨 뜻일까? 한국에 본가는 없지만 나는 일단 문제없이 입국할 수 있는 여권이 있어서 축복받은 편이지. 돌아갈 곳도, 다음으로 갈 목적지도 없는 사람이 많으니까.


나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넘어가는 그 중간지점이 불편하고도 좋아. 묶여있지 않고, 수시로 움직이고, 창 밖 풍경이 매 순간 바뀌는 공간. 이쪽에 다리 하나, 저쪽에 다리 하나 두고 이쪽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하고 저쪽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두 곳 다 당당하게 대표할 수 없는 나는 충분히, 완벽히, 어느 곳의 사람도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자유가 있거든. 그 자유가 해방감일 수도, 불안감일 수도 있지만 말이야. 너는 부족하다며, 여기 있을 자격이 없다며 손가락질받지 않고, 뒤를 돌아보고 앞을 내다보는, 걱정과 기대가 공존하는 위험하고 안전한 지역. 앞으로도 그 사이에서 머무는 시간들을 소중히 대할 수 있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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