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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나 Mar 07. 2022

익숙하고 특별한 언니의 집

돌아오는 티켓 없이 튀르키예로


언니 집은 창문을 열지 않더라도 이틀 만에 바닥에 먼지가 쌓이고, 하루에 다섯 번 근처 모스크에서 아잔이 흘러나온다. 오후 4시 30분쯤 집 안으로 황금색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면 집안에 온갖 먼지가 자유롭게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거실은 한쪽 벽이 다 창문인데, 제대로 된 커튼 구하기를 미루고 또 미루고 있어 얇고 비치는 흰색 속 커튼만 대충 처져 있다. 언니도 나도 한 곳에서 오래 살았던 적이 없으니, 어디든 여기 얼마나 있으려나 싶어 이사 가는 지인에게 물건을 헐값에 사 오거나 받아오는 편이다. 하지만 2%씩 부족하더라도 갖출 건 다 갖추고 사는 것 같기도. 이렇게 하나씩 모으다 보면 신기하게도 당연히 없을 것 같은 물건이 생긴다. 요거트 기계, 크리스마스트리, 쿠키 커터, 심지어 과카몰리나 에그노그 믹스까지 있다. 물론 빨래건조대가 두 개나 있음에도 멀쩡한 건 한 개도 없는 것처럼, 아직까지 우리 사전엔 가구, 물건 하나하나 골라 들이는 자취방은 없다. 생기는대로 살고 가끔 보물을 얻어오고 또 가끔 작은 투자도 한다. 나는 마트에 갈 때마다 그 앞을 오래 서성이게 만들었던 케이크 틀을 큰맘 먹고 샀고, 언니는 어느 날 전자건반을 등에 이고 문 앞에 나타났다. 친구가 새로운 건반이 생겨서 원래 있던 걸 처분한다고 하니 냉큼 받아왔단다.


라면스프와 파히타 파우더, 쿠민 시드가 공존하는 부엌에 부직포 걸레와 민트 초코 치약, 트위티 핸드 소프가 함께 붙어있는 화장실이라니, 공짜라고 하면 집어오는 습관이 언니한테도 있는 게 분명하다. 반 정도만 차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청소 스프레이만 6개가 넘는다. 잡탕 같은 이 집은 문화도 언어도 식습관도 아주 짬뽕이 되어버린 자매의 모습이다.


요즘 밖에선 겨울 공기 냄새가 난다. 아무리 추워도 환기는 해야 되겠다 싶어 창문을 열면 콧속까지 시린 공기가 화악 들어온다. 상쾌하고 속이 뚫리는 냄새. 비 오고 우중충한 날씨 말고, 전날에 눈이 많이 와서 하늘은 깨끗하고 햇빛은 쨍쨍한데 공기는 귀가 아릴 만큼 차가운 날씨의 냄새 말이다. 학교가 쉴 정도로 며칠째 눈이 쌓여서 밖은 하얗고 깨끗하다. 아침엔 땅에 쌓인 눈이 빛을 반사하며 반짝인다. 아파트만 잔뜩 들어선 이 동네는 길가에서 가끔 짖는 강아지(라고 하기엔 초등학생 몸집에 꾀죄죄한 ‘개’들이지만, 지금껏 본 아이들은 눈빛만은 세상 다 포기한 순한 애들이었다. 사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아이들이 많다) 소리와 출퇴근길 왔다 갔다 하는 자동차 소리 말고는 바람소리만 들리는 편이다.


튀르키예는 중학교 때 일주일 정도 관광 겸 왔던 이후로 처음이다. 주로 많이 걸어서 힘들거나, 밤새 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피곤하거나, 딸꾹질이 안 멈춰서 혹시 이렇게도 사람이 죽을 수 있는지 걱정했던 기억이 나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나 그렇듯 즐거운 여행으로 순화된다. 유명한 관광지에 가고 먹어야 할 것도 실컷 먹긴 했지만 강렬했던 기억만 생생하게 남았다. 사람 바글바글한 이스탄불 쇼핑 거리 도로 정중앙에서 과격하게 넘어졌었다. 얼굴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그러니까 영어로 그런 말이 있는데, fell flat on my face, 딱 그렇게 곤두박질치는 새처럼 넘어졌다. (물론 내가 충격받아 과장된 기억이겠지만) 내 앞뒤로 사람들이 홍수처럼 갈라졌다. 뒤에서 어떤 남자가 나를 일으켜주려 다가왔는데, 나는 벌떡, 정말 벌떡 일어나서 언니에게로 장군처럼 저벅저벅 걸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 남자 무안했겠다 싶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보이는 게 있다. 중동과 서유럽에서 살아본 후에 오니 묘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튀르키예가 그 사이에 위치한 나라니까 그런 것도 있겠다. 언니에게 이곳에 대해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가끔 예멘 느낌도 나고, 독일 느낌도 나는 곳이라, 신기하게도 익숙한 곳이라고. 어쩌면 언니는 나름 언니와 어울리는 나라에 다다랐나 보다.




이번에 한국에 정착한답시고 호기롭게 들어갔다가 1년 3개월 만에 (체감상 2년은 넘은 줄 알았다) 포기한 후, 언니 보러 간다는 핑계 하에 다시 국제공항에 들어섰다. 주로 공항버스를 타는데, 코로나로 운행을 거의 안 하는 바람에 택시를 타고 서울역까지 가 공항철도를 탔다. 덕분에 할아버지와 5분 넘게 실랑이를 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요 앞까지 도와줄 테니 지하철 타고 가라고 하시면서 노선을 읊어가며 설명하시고, 나는 가는 법은 인터넷에 다 나오지만 할아버지가 상상하는 것보다 짐이 훨씬 무겁고 많을 테고 그걸 어떻게 언덕 아래로 끌고 내려가서 환승하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냐고, 차라리 택시비를 내겠다고 했다. 웬만해선 택시를 안타는 우리 가족이기에 성인이 된 후 내 돈 내고 혼자 택시를 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떠나기 몇 주 전부터 뭐 필요하냐며 이것저것 챙겨주시려고 하는 할머니에게 가지고 가봤자 다 못 먹는다는 말만 반복하며 직접 말리신 표교버섯 한 줌, 다시마와 멸치 한 줌, (나중에 할머니 몰래 반 넘게 덜어낸) 고춧가루 한 봉지를 받았다. 언니 부탁으로 다이소를 지나갈 때마다 들어가 하나씩 모은 보석 십자수 세트와 고양이 장난감도 이민가방에 차곡차곡 담았다. 공항 못 가는 악몽도 꾸고, 전 날 잃어버렸던 체크카드도 찾고, 백신 서류도 프린트하며 마지막 날을 보냈다. 택시기사님이 혹시라도 짐 때문에 불편해하실까 봐 비타 500도 하나 샀는데, 결국 까먹고 공항에서 내가 원샷했다.


보통 비행기를 탈 때 경유지를 통해서 가는 편이다. (워낙 직행이 없는 곳에 많이 가기도 했고) 경유를 많이 하거나 경유 시간이 애매하게 길수록 (나가기는 그렇고 가만히 있기도 어려운 7시간 같은) 가격이 내려갈 때도 있다. 경유를 하면 출발지와 마지막 도착지까지 나와 같은 사람을 보기는 어렵다. 어쩌면 저 한국사람이 우리 국제학교 신입생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 대학교 룸메이트면 어떻게 인사할까, 어쩌면 저 백인 여자가 언니 학교에 새로운 선생님일까 하며 눈치껏 주변을 관찰했었다. 독일 사람들 중에 한국사람 한 명, 요르단 사람들 중에 한국사람 한 명처럼 여권 색이 눈에 띄는 사람이 되어버릴 때가 있는데, 가끔은 나만 그런 게 아니라 한 두 명 더 있었고, 나는 저들은 어떤 사연이 있을지 상상하곤 했다. 이번에도 테이프로 칭칭 감싼 짐가방 서너 개를 힘겹게 끌고 오는 가족과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마주쳤다. 사실 위태로운 타워처럼 쌓여있는 짐보다 버거워 보인 건 엄마 품에 안긴 아기와 아빠 옆에 서있는, 이제 막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둘이었다. 비행기에 앉아서 하나둘씩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을 보고 있을 때 그 가족이 들어왔다. 아이 몸집만 한 큰 등산배낭을 겨우 내려놓고 꾸깃꾸깃 접힌 유모차와 가방 세 개를 저 앞쪽, 저 뒤쪽에 자리 남은 짐칸에 쑤셔 넣는 아빠,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한 명 한 명 앉히는 엄마, 모두가 자리 잡고서야 한숨을 내쉬는 부부.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우리 가족이 처음 해외로 이사 갈 때 부모님의 모습이 저랬을까 생각하니 풋풋하기도, 안쓰럽기도 하다. 나는 얼떨결에 업그레이드 되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탄 비즈니스 좌석에서 이륙 전 받은 오렌지 주스 한잔에 그저 무진장 감탄하고 들떴던 기억만 어렴풋이 남았으니 말이다.


저 가족 앞에 펼쳐질 날들은 어떨지, 저 아이들은 무슨 언어를 하고 무슨 고민을 하며 자랄지, 생각에 잠기며 한국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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