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rin Aug 05. 2023

여름 한낮의 요리

얼마 전 생일에 접시와 컵을 선물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포장지에 싸인 채 선반에 들어가지 못했다. 어떤 음식을 담을지 들떠서 생각하던 중에 이사를 계획하게 되면서 결국 그릇은 여전히 포장지에 싸인 채로 있다. 오후에 누워서 유튜브에 올라온 짧은 영상들을 넘기다가 어떤 댓글을 봤다. 영상 속에는 재료를 툭 집어다 대충 놓고 마구잡이로 음식을 대충 빨리 만들고 있는 장면이 담겨있었다. 누군가 댓글로 음식은 정성이 담겨 그 에너지가 전달되는 건데 저런 음식은 영혼이 상할 거 같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그 댓글을 보고 맞지 하며 나지막이 말하고선 다시 영상을 넘기기 시작했다.

요즘은 음식을 만들 일이 잘 없다. 나에게 있어서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내 일상의 피로와 균열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혼자 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는데 나를 돌보기 위해서는 나를 스스로 잘 먹이는 일은 꼭 필요했다. 내가 먹을 음식을 위해서 재료를 사고 시간을 들여 만들고 먹는 일은 나를 돌볼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 일이며 그 에너지가 소실되면 그 돌봄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시간과 정성을 들인 음식을 타인과 나누는 일은 그래서 그 기운을 나눌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을 정돈하고 잘 자고 스스로에게 음식을 먹이고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이 일련의 루틴은 나를 위해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 다른 지역으로의 이사가 결정되면서 나는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주방을 혼자 쓰고 싶었고 혹시라도 친구가 놀러 온다면 자고 갈 공간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겨울에는 맛있는 수프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과 연말에는 근사한 요리를 만들어 친구와 함께 나눠야겠다는 나만의 계획을 세우니 금세 즐거워졌다.

전에 호주에서 지낼 때 친구는 내가 살던 아파트 옆에 있는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한여름을 보내던 어느 날 친구는 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왔다. 미역국을 좋아하는데 생일에 미역국을 먹지 못했다면서 혹시 끓여줄 수 있겠냐는 부탁이었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재료까지 사다 줄까 싶어 쉬는 날 친구에게 가져다 줄 음식을 만들었었다. 친구의 부탁대로 미역국을 냄비 가득 끓이고 같이 먹을 반찬이 좀 필요하겠다 싶어 만들어둔 장조림도 조금 싸두었다. 친구는 거의 매일 하루에 두 군데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분명 음식을 만들어 먹을 시간의 여유가 없었을게 너무 눈에 훤했다. 마침 집에 고추가 남은 게 있어 어묵을 넣고 간단하게 김밥도 만들었다. 퇴근하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내가 먹을 저녁으로 만들면서 같이 더 만들었다. 막상 해보니 더운 여름에 야채 써는 것도 일이었지만 이젠 짜증도 없이 더위를 잘 견딜 수 있게 되었다. 미역국의 간을 맞추고 김밥을 다 싸고 뒷정리를 하니 얼굴이 벌겋게 땀이 흥건했다. 음식을 잘 싸서 친구에게 가져다주었다. 금세 김밥 하나를 꺼내 입에 넣고서는 맛있다며 좋아하는 친구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집에 가는 길에 다 먹을 거 같다면서 싸다준 미역국을 보며 친구는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다음날 친구는 미역국에 밥과 장조림을 먹었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너무 오랜만에 집밥을 먹는 거 같다면서 눈물이 날 거 같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한낮에 흘린 땀과 더위가 무색할 만큼 고마운 인사였다. 음식을 나누는 일에 고맙다 인사를 건네고 맛있게 먹어주는 나의 친구들이 나는 종종 그립다.

사실 난 누군가 가장 자신 있는 음식이 뭐냐고 물어보면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게 없다. 종종 내가 먹고 싶었던 음식을 만들고 같이 나눠 먹기 때문에 늘 다른 음식을 만들곤 한다. 시간과 정성을 들인 음식을 알아주는 사람들은 늘 기억에 오래 남는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음식에 들어간 마음을 아는 사람들과 나누는 일이 나에게는 더 소중하고 의미가 있는 일이 되었다. 같이 살았던 룸메이트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 내가 만들어준 라자냐가 생각나 식당에 가서 시켜 먹었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만큼 맛이 있지 않다면서 그 라자냐가 먹고 싶다고 그립다고 했다. 다른 친구는 추운 겨울에 내가 끓여준 짜이라테가 제일 맛있었다며 종종 생각이 난다고 했다.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기억에는 함께 나눴던 음식이 자리했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기억해 준다는 사실은 제법 기운 나게 만드는 일이다. 사실 난 음식에 대한 강한 향수나 추억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었다. 엄마가 해주는 어떤 음식이 먹고 싶다거나 이런 건 있어도 어떤 특별한 기억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예전에 집에 감자가 좀 남아서 어쩌나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생각난 요리가 있었다. 바로 집을 나서서 작은 오목한 팬을 하나 사 와서는 Tortilla de patatas를 만들었다. 과거의 실패의 전적을 가진 요리라 이번에는 잘 나오길 바라면서 열심히 만들었더니 아주 예쁜 케이크 시트 같은 모양이 나왔었다. 같이 사는 친구를 기다리면서 한 조각 잘라 씹어 먹는데 갑자기 찡해졌다. 불현듯 이 음식을 같이 먹었던 사람들 생각이 났다. 입 밖으로 아 그립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나의 실패작이었던 이 음식을 먹으며 신나게 웃고 떠들던 기억이 났다. 음식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난 늘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과 그 시간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좋았다. 아주 오래 전의 나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아닌 그 음식의 나눔을 받는 게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친구들이 만들어준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다. 나에게 오래된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밥상머리에서 비밀이라는 전제가 없어도 모든 걸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친구들의 음식을 그리워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젠 누군가 나를 그렇게 기억해주고 있다. 그래서 난 나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얼마 전 한국에 다녀왔을 때 친구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지 못한 일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생각보다 바쁜 일정에 쫓겨 한 달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게 사라졌다. 우리는 또 언제쯤 한자리에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눌 수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하면 기분이 좋다가도 그게 언제쯤 일지 아득해지기도 한다. 이제 해는 다시 짧아질 거고 겨울은 찾아올 것이다. 내년에는 여름 한낮의 요리를 누군가와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생각이 많은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