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또한 혼자 떠나는 첫 여행지로 왜 군산을 택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어렸을 때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에서 보았던 초원 사진관이 어렴풋이 뇌리에 남아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왜 혼자서 여행하고 싶어졌는지는 기억나요. 그때 좋아하던 사람과 헤어졌거든요. 조금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그 당시에 썼던 일기에, ‘좋아하는 사람과 전화하는 일이 마치 함께 낯선 여행지를 걷는 일 같다.’라고 적었었네요. 지금 보면 굉장히 쑥스러운 표현이지만 당시에는 저녁에 그녀와 통화를 나누고, 할 말이 없어도 전화를 귀에서 떼지 않고 서로 편안히 침묵하는 것이 저의 어떤 일상이었거든요. 수화기를 하도 오래 들고 있다 보니 귓병까지 생기기도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별하게 되니, (일기의 표현을 빌리자면)같이 가던 여행을 이제 혼자 가게 되는,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냥 현실에서도 혼자 훌쩍 군산으로 떠나본 겁니다. 현실과 마음 간의 유리감을 줄여보고 싶어서요.
위에서 잠깐 말했던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에는 다림(심은하 扮)이 사진관 문틈으로 편지를 밀어 넣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어떤 날은 화가 나서 사진관 유리에 돌을 던지는 장면도 나와요. 저는 그 모든 게 같은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편지도, 돌팔매질도 모두 사랑에서 뻗어 나온 거라는 거요. 정원(한석규 扮)이 다림에게 답서를 쓰고는 결국 부치지 않고 그대로 함에 담아두는 장면도 그와 같은 마음이었을 테고요. 저도 당시에 그 사람에게 기대하기도 했고, 원망하기도 하고, 끝내 품어두기만 한 마음도 있었어요. 그렇다면 저의 귓병이나 방랑벽, 글쓰기 역시도 모두 한 가지에서 뻗어 나온 일이 될 겁니다.
그녀가 제게 선물했던 시집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시인은 ‘내게 한 사람이 온다.’는 말을 이렇게 써냈어요. ‘저기 멀리에서 내 손에 굵은 실을 매어줄 이가 오고 있다.’라고요. 그 시의 화자는 누군가 내게 와주고 있다는 설렘과 걱정과 기대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제가 좀 더 눈여겨본 것은 ‘실’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사람은 인연을 꼭 끈이나 실 같은 데 비유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걸 최초로 비유한 인간이 누군지는 몰라도, 저는 그 사람이 대단히 은유적인 사람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무언가를 단단히 묶어 주는 역할을 하지만, 언젠가 가위로 끊어질 수도 있잖아요. 만약 쇠사슬 같은 것에 비유했으면 잘 안 어울렸을 것 같아요.
저는 인연처럼 이별을 비유한 사물도 찾고 싶었는데, 딱히 그런 것은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제 마음대로 인연이 실이라면, 이별은 무딘 가위라고 하기로 했습니다. 인연이라는 건 잘릴 때 항상 깔끔하게 잘리지가 않잖아요. 아무리 그렇게 잘라내려고 해도, 무딘 가위로는 가장자리에 가시랭이 실들이 하느작거리며 늘어지게 되기 마련입니다. 미움이든 그리움이든 혹은 허무함이든 사랑했기 때문에 아마 슬픈 시간이 찾아올 거라는 말입니다.
이제 군산에 다녀오고 나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군산에 다녀오지 않았던 날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됩니다. 운 좋게 실낱이 조금만 남게 자를 수는 있겠지만 아예 없이 잘라낸다는 건 불가능한 것처럼요. 어쩌면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는 건, 아주 오랜 상실감을 안고서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악착같이 사랑해 나가야 하는, 그런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