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을 합니다.
거의 모든 상황에 늦습니다.
약속 시간에 몸이 도착해야 하는 상황은 일관되게 늦고, 서류를 제출하거나 책을 반납하거나 과속 벌금 따위의 돈을 내는 상황은 거의 1초 전 수준으로 골인을 하거나 늦거나입니다.
저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생긴 이래로 지각을 해왔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 알바, 그리고 내 자녀들의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부끄럽지 않느냐고요?
부끄럽습니다.
지각할 때마다 자괴감이 들지 않느냐고요?
듭니다.
그런데 왜 안 고치냐고요?
안 고쳐지니까요.
20대 중반쯤 지각이 저의 불치병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뭔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을 것이다.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엉클어져 버린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한 때는 그 원인이 엄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나를 때리고 소리치던 히스테릭한 엄마 때문에 시간 개념이 개박살이 난 거라고, 나의 여러 신체적 정서적 특징들을 만든 엄마가 지각하는 심리까지 만든 거라고 말이죠.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엄마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불충분해요.
혹시 유전적인 요인이 있지 않겠냐고요?
그건 확실히 아닙니다.
아버지는 완벽주의자라 늦었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5분 전입니다. 어머니는 늘 본인 좋아하는 것만 하시기 때문에 신이 나서 30분 정도 일찍 갑니다. 오빠는 FM이기 때문에 거의 정시에 모든 일을 처리하고요. 그러니까 유전은 아닌 겁니다.
지각을 하는 이유를 찾아 헤매면서 타인에게 들은 힌트가 두 가지 있습니다. 그중에 첫 번째는 이거예요.
“욕심이 많아서 그래.”
욕심? 내가 지각을 하는 게 욕심 때문이라고? 처음에는 기분이 나빴어요. 내 욕심 채우느라 평생 늦었다는 말은 납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더군요.
지하철 시간 뻔한데 감자 한 알 껍질 까서 입에 넣느라 늦었고
약속 시간 뻔한데 신발 고르느라 늦었고
원고 제출 시간 뻔한데 한 번 더 고치고 보내느라 늦었고
책 반납일이 뻔한데 다 보고 반납하느라 늦었습니다.
제 욕심을 채우는 것이 더 중요했던 거죠. 저는 공공의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개인의 욕구 충족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 겁니다.
두 번째 타인의 힌트는 이것입니다.
“그냥 그게 너인 거야.”
첫 번째 힌트와 비슷한 말인데 추가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개인의 욕구 충족이 중요해서 약속된 시간을 지키기 힘든, 아니 지키지 않는 것이 너인데 그런 너를 알고 받아들여라. 인 거죠.
저는 정말 지각을 하기 싫은데, 원인을 알고 바뀌고 싶은데 그게 너의 모습이야, 받아들여.라고 하니 이런 얘기를 해준 두 사람이 몽땅 미웠습니다.
그런데 지각의 행위가 철저하게 반복되고
자책, 자괴감, 분노, 좌절감이 저를 갉아먹는 것을 보면서 나의 이 생각과 감정이 문제라는 인식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각=실패>
<지각하는 사람=루저>
라는 생각의 공식을 싹 지우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지각에 대한 아무런 해석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말대로 지각하는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지각하는 내가 오케이 되려면 다른 사람에게 주는 피해로 인해 내 마음이 괴로운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몇 가지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그중에는 이런 것이 있어요.
*약속 시간을 점이 아니라 선으로 잡는다.
예를 들면 ‘10시’가 아니라 ‘10시에서 10시 20분’으로 잡는 거죠.
*도서관에서 빌린 책 반납은 남편이 한다.
완독 여부와 상관없이 반납을 하고 덜 읽은 책 제목을 써주면 다시 빌려옵니다.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일은 직장 출퇴근이 아니라 프리로 하고 있으니 같이 글 쓰는 사람들끼리 만든 글 공유 기한만 지키면 됩니다. 지금 그 기한을 지키는 중이고요. 물론 막차입니다.
지각을 지각으로만 보고, 지각하는 나를 판단 없이 수용한 지가 얼마 안 되어서 앞으로 어떻게 진행이 될지는 더 지켜봐야겠지요. 어쨌든 지금 저는 꽤 자유롭습니다.
앞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받아보겠습니다.
부끄럽지 않아요?
부끄럽지 않습니다.
지각할 때마다 자괴감이 들지 않아요?
네, 들지 않습니다.
그 습관을 왜 안 고치나요?
고칠 필요가 없으니까요.
저는 지각을 합니다.
그냥 지각을 합니다.
그냥 지각을 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