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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록 Jun 04. 2022

지각을 합니다



지각을 합니다.

거의 모든 상황에 늦습니다.

약속 시간에 몸이 도착해야 하는 상황은 일관되게 늦고, 서류를 제출하거나 책을 반납하거나 과속 벌금 따위의 돈을 내는 상황은 거의 1초 전 수준으로 골인을 하거나 늦거나입니다.      


저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생긴 이래로 지각을 해왔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 알바, 그리고 내 자녀들의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부끄럽지 않느냐고요?

부끄럽습니다.

지각할 때마다 자괴감이 들지 않느냐고요?

듭니다.     

그런데 왜 안 고치냐고요?

안 고쳐지니까요.     


20대 중반쯤 지각이 저의 불치병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뭔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을 것이다.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엉클어져 버린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한 때는 그 원인이 엄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나를 때리고 소리치던 히스테릭한 엄마 때문에 시간 개념이 개박살이 난 거라고, 나의 여러 신체적 정서적 특징들을 만든 엄마가 지각하는 심리까지 만든 거라고 말이죠.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엄마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불충분해요.     


혹시 유전적인 요인이 있지 않겠냐고요?

그건 확실히 아닙니다.


아버지는 완벽주의자라 늦었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5분 전입니다. 어머니는 늘 본인 좋아하는 것만 하시기 때문에 신이 나서 30분 정도 일찍 갑니다. 오빠는 FM이기 때문에 거의 정시에 모든 일을 처리하고요. 그러니까 유전은 아닌 겁니다.           






지각을 하는 이유를 찾아 헤매면서 타인에게 들은 힌트가 두 가지 있습니다. 그중에 첫 번째는 이거예요.     


“욕심이 많아서 그래.”     


욕심? 내가 지각을 하는 게 욕심 때문이라고? 처음에는 기분이 나빴어요. 내 욕심 채우느라 평생 늦었다는 말은 납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더군요.     


지하철 시간 뻔한데 감자 한 알 껍질 까서 입에 넣느라 늦었고

약속 시간 뻔한데 신발 고르느라 늦었고

원고 제출 시간 뻔한데 한 번 더 고치고 보내느라 늦었고

책 반납일이 뻔한데 다 보고 반납하느라 늦었습니다.


제 욕심을 채우는 것이 더 중요했던 거죠. 저는 공공의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개인의 욕구 충족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 겁니다.     


두 번째 타인의 힌트는 이것입니다.     


“그냥 그게 너인 거야.”     


첫 번째 힌트와 비슷한 말인데 추가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개인의 욕구 충족이 중요해서 약속된 시간을 지키기 힘든, 아니 지키지 않는 것이 너인데 그런 너를 알고 받아들여라. 인 거죠.


저는 정말 지각을 하기 싫은데, 원인을 알고 바뀌고 싶은데 그게 너의 모습이야, 받아들여.라고 하니 이런 얘기를 해준 두 사람이 몽땅 미웠습니다.   

  





그런데 지각의 행위가 철저하게 반복되고

자책, 자괴감, 분노, 좌절감이 저를 갉아먹는 것을 보면서 나의 이 생각과 감정이 문제라는 인식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각=실패>

<지각하는 사람=루저>   

  

라는 생각의 공식을 싹 지우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지각에 대한 아무런 해석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말대로 지각하는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지각하는 내가 오케이 되려면 다른 사람에게 주는 피해로 인해 내 마음이 괴로운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몇 가지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그중에는 이런 것이 있어요.   

 

*약속 시간을 점이 아니라 선으로 잡는다.

예를 들면 ‘10시’가 아니라 ‘10시에서 10시 20분’으로 잡는 거죠.   

  

*도서관에서 빌린 책 반납은 남편이 한다.

완독 여부와 상관없이 반납을 하고 덜 읽은 책 제목을 써주면 다시 빌려옵니다.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일은 직장 출퇴근이 아니라 프리로 하고 있으니 같이 글 쓰는 사람들끼리 만든 글 공유 기한만 지키면 됩니다. 지금 그 기한을 지키는 중이고요. 물론 막차입니다.   

        

지각을 지각으로만 보고, 지각하는 나를 판단 없이 수용한 지가 얼마 안 되어서 앞으로 어떻게 진행이 될지는 더 지켜봐야겠지요. 어쨌든 지금 저는 꽤 자유롭습니다.






앞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받아보겠습니다.     


부끄럽지 않아요?

부끄럽지 않습니다.    


지각할 때마다 자괴감이 들지 않아요?

네, 들지 않습니다.     


그 습관을 왜 안 고치나요?

고칠 필요가 없으니까요.     



저는 지각을 합니다.


그냥 지각을 합니다.


그냥 지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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