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름과 떠올림

깊은 바다에 던져 넣은 다이아몬드

by Bella

어느 기억은 떠오르고, 어느 기억은 떠올린다. 보통 전자는 잊고 싶은데 지독히 잊히지 않는 기억, 후자는 오래 기억하고 싶은데 쉽게 잊혀지는 기억인 경우가 많다.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있거나 썩 달갑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을 앞둔 때, 단톡방에 카톡 메시지를 잘못 보내 식은땀이 등 전체를 뒤덮는 순간 어떤 기억은 문득 떠오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환되는 모종의 기억은 발표를 망쳐 배가 갑자기 아파오던 날이거나, 직장 동료들 앞에서 말실수를 해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어버린 순간의 기억이다. 그런 기억은 흰 옷에 쏟은 김치 국물처럼 지우고 싶어도 잘 지워지지 않고 시큼한 냄새를 풍긴다. 잘 보이고 싶은 자리에서 발견한 올 나간 스타킹이라든지, 뜯어진 블라우스 옆구리에 당황해 겨드랑이를 흠뻑 적신 날들이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머릿속에 재상영된다. 그런 기억은 떠오르는 기억들이다.


가만히 소파에 앉아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저녁이나, 샤워하고 나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에어컨 바람으로 적당히 시원해진 이불을 덮고 나서 누운 밤에 나는 종종 기억을 떠올린다. 보통은 지치고 힘들었던 날, 그게 아니라면 기분이 우울한 날이다. 기억을 떠올릴 때는 오래된 우물 속에 두레박을 넣어 휘젓는 기분이 든다. 온갖 침전물이 다 떠올라 부옇게 흐려진 흙탕물 속에서 내가 원하는 기억이 떠오를 때까지 오래도록 과거 속을 헤맨다. 그런 기억은 깊은 바다 속 잠든 난파선 같은 느낌이다. 찾는 데 꽤 시간이 걸린다. 심해에 잠긴 기억을 생각의 수면 위까지 끌어올리는 데는 힘이 든다. 그래서 애써 떠올려야 하는 기억은 금방 잊힌다. 반짝 하고 빛났다 금방 가라앉아 버리는 모래사장 속의 사금 같다.


보통 내가 힘들여 떠올리는 기억은 이런 것이다. 할머니댁에 살던 시절 나와 동생은 몸집이 작았다. 더운 여름밤, 욕조가 없었던 그 집에서 엄마는 가끔 빨간 고무대야에 물을 받아 마당에서 목욕을 시키곤 했다. 그 때 밤하늘에 빛나던 별과, 젖은 동생의 머리카락이 엉겨붙던 느낌과 비누가 묻어 미끈미끈했던 서로의 살결의 감촉이 기억난다. 여름 한 나절 고무 대야 바닥에 얕게 고인 물에서 꾸물거리던 장구벌레처럼 우리는 그렇게 가끔 대야 속에서 물장난을 했다.


또는 이런 기억이다. 나의 외갓집은 보령 오천으로, 비좁은 골목을 몇 번 꺾어 지나면 비린내가 풍기는 항구가 나왔다. 잡화점을 하시던 외할아버지 덕에 가게에는 이런저런 물건이 많았다. 알록달록한 머리핀을 갖고 놀다가 항구에 정박한 배와 배 사이에 그걸 떨어뜨리고 나는 울었다. 배와 배 사이는 좁고, 바다는 깊어 푸르다 못해 검었다. 우는 나를 달래려고 외할머니는 가게 옆에 세워진 자판기에서 200원짜리 코코아를 뽑아 주셨다. 코코아는 다 마시고 난 다음에도 혀 끝에 들러붙어 오랜 단맛을 냈다.


어느 날 그 항구에서 어린 나는 아빠 등에 무등을 타고 있었다. 해먹을 주물럭거려 두 손이 온통 까맸다. 그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최초의 기억이라서 떠올리려면 무척 오래 바닷속을 휘저어야 한다. 나는 이제 아빠보다 여섯 살이 많다. 아빠는 영원히 서른 살에 머물러 있다. 내가 갖고 있는 아빠에 관한 기억은 그게 유일하다. 다른 것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얼굴이 유독 희고 큰 키에 마른 체구였던, 동네에서 연탄 트럭을 몰았다는 아빠의 이야기는 전래동화처럼 할머니의 입에서, 엄마의 입에서, 고모의 입에서 내게 삼십 년의 시간 동안 구전으로만 전해질 뿐이다.


나는 예전에 어느 시인을 좋아했었다. 시집에 담긴 말이 온통 맑고 신선했다. 그는 나처럼 가까운 가족을 잃은 경험이 있었다. 그의 시집을 읽고 나서 나는 가족을 잃었던 슬픔이 돈으로 환산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슬픔은 단정한 활자로 찍혀져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나는 가끔 내가 아빠를 잃은 기억도 돈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 아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항구에서 해먹으로 두 손을 까맣게 물들인 날 외에 다른 날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타이타닉에서 늙은 로즈는 영화 말미에 푸른 다이아몬드를 바다 깊은 곳에 던져 넣는다. 나는 그게 로즈만의 기억 보관법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금고. 나는 단 하나 가진 아빠의 기억도 그렇게 바다 깊은 곳에 보관하기로 했다. 아무도 그게 거기 있다는 것을 몰라도, 그건 값비싸고 귀중한 물건이다. 로즈는 그 바다 깊은 곳에 빛나는 푸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도 내 바다 깊은 곳에 작고 단단한 기억 한 조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꽤 걸리기는 하지만, 나는 가끔 그걸 건져올려 손바닥에 놓고 들여다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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