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있는 슬픔

나이 먹는 게 싫은 이유

by Bella

며칠 전 집 앞 파리바게트가 새로 문을 열면서 이틀간 전제품 25% 세일을 한다고 온 동네 현수막을 붙이고 아파트 단지마다 전단지를 돌렸다. 100m도 안되는 곳에 3개월 전 뚜레쥬르가 문을 연 게 걱정되어 남편과 몇 번 얘기를 나눴는데, 지나가다 보니 뚜레쥬르 매장 전면에 크게 30% 할인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어제는 아파트 헬스장에 어떤 여자가 꼬마를 데리고 왔다. 나는 헬스장에 가는 길에 우연히 그 여자와 마주쳤다. 마스크 벗은 맨 얼굴을 보고 '사람이 저렇게 지쳐보일 수 있나?' 하고 순간 생각했던 터라 얼굴이 기억에 남았다. 아이는 막대사탕 하나를 물고 헬스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어서 운동기구를 마구 만져댔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처음에는 아이 혼자 헬스장에 온 줄 알았다. 여자는 표정 없이 운동기구에 앉아서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내가 아이의 보호자를 찾자 손짓으로 꼬마애를 불렀다. 운동이 끝나고 나오면서 보니 여자는 꼬마가 먹던 사탕을 문 채 여전히 같은 운동기구에 앉아 허리를 돌리고 있었다.


애를 헬스장에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해요, 여기에 애를 데리고 오면 안돼요, 생각했지만 나는 말을 삼켰다. 오죽하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마트에 들렀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헬스장 앞에서 여자와 꼬마를 다시 만났다. 누군가 항의해서 헬스장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꼬마는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몇 번 듣던 익숙한 울음소리였다.


요즘은 이런게 너무 슬프다. 이해할 수 있는 슬픔이 너무 많아졌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이래서 싫다. 그 사람이 어떤 심정일지, 무슨 생각을 할지, 얼마나 속상할지, 그런 일련의 감정들이 마치 나에게 닥친 재난처럼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드라마도 잘 안 보게 되고, 영화도 SF나 판타지 위주로 본다. 소위 '힐링'을 위해 역경을 극복하는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타인의 슬픔을 어떻게 견디는 걸까. 나는 내 현실도 가끔은 감당할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이의 슬픔을 바라볼 생각을 하는 걸까.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소한 순간 밀어닥치는 다른 이의 불행을 잠깐 겪는 것도 감정 소모가 꽤 심하다. 가끔씩 문득 문득 떠올라 내 주변의 공기를 회색으로 물들이고 마음에 작은 얼룩을 남기고 간다.


예전에는 어떻게 그런 것들을 금방 잊었을까.


잔이 비어서 그랬나 싶다. 잔 속에 이미 담긴 물이 많으면 조금만 따라도 물이 넘치듯, 슬픔도 그런 것 같다. 나무의 나이테는 말 그대로 나이의 흔적 아닌가. 사람도 나이테처럼 몸 속에 기억과 경험을 채워가며 나이가 든다. 나무가 자라며 그늘이 넓어지듯, 나도 어른이 되면서 그늘이 늘어간다. 이해되지 않았던 어른의 행동은 내가 같은 나이가 되고 나서야 이제 이해가 간다. 그저 삶을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지치는구나, 그래서 그 때 그럴수밖에 없었겠구나 싶다. 무엇보다도 엄마,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


타인을 이해하게 된 것은 어른이 된 귀중한 수확이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호의를 베풀만큼의 넉넉한 여유를 갖지는 못하고 산다. 나는 뚜레쥬르 눈치를 보며 새로 문 연 파리바게트에 가서 버터바른 꿀토스트를 사고 천 원어치 할인과 무료 아메리카노 쿠폰을 받았다. 갓 구운 식빵은 맛있었고 나는 금세 타인의 불행을 잊었다. 천 원 어치 빵값 할인을 받는 이런 뼛속까지 소시민인 나를 마주해야 하는 일도 역시 슬프다. 슬프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복잡한 - 내가 파리바게트에 간다고 해서 뚜레쥬르에 못된 짓을 하는건 아니라는 자기 합리화를 해야 하고, 그 동안 뚜레쥬르를 자주 갔으니 이번에는 파리바게트에 가서 새로운 빵을 먹고 싶은 건 당연하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25% 할인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만큼 통장잔고가 넉넉하지 않은 스스로의 경제상황에 대한 비관섞인 반성을 해야 하고 - 일련의 감정을 겪고 나니 역시 나이가 든다는 건 여러모로 싫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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