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싸웠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보일 수 없는 애매한 곳에 뾰루지가 나서 며칠 째 고생하고 있다. 속이 아프다. 벼르고 별러 한 눈썹 문신은 서른 살 먹은 짱구처럼 보인다. 이때다 싶어 삼전 주식을 샀는데, 내가 산 곳이 1층인줄 알았는데 지하실이 있었다.
인생은 관성의 법칙이 있다. 잘 풀린다 싶으면 그 기세를 몰아 좋은 일이 계속 일어나고, 이건 아니다 싶으면 지속적으로 계속 안 좋은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는 아주 유명한 법칙이다.
그럴 때 긍정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할 지 모르겠지만, 나같은 하이레벨급 냉소주의자들은 대체로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이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는데 뭐." 또는 "이것보다 더 안 좋아질 수도 있겠지."
좋은 일이 생겨도 마찬가지다. 넋놓고 기뻐하는 게 아니라 우연히 먹이를 얻은 미어캣처럼 한껏 목을 빼서 주위를 살피며 간만에 찾아온 행복이 언제 불행에게 영역을 침범당할까 두려워하며 사방을 살핀다.
사주팔자를 맹신하는 버릇도 냉소주의자의 특징인 것이 틀림없다. 모든 것이 운명으로 결정지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이런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리면 오히려 불안해한다. 분명히 이 쯤 되어서 뭔가 문제가 하나 발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그제서야 안도한다. 그게 아끼는 쉬폰 원피스가 가구 모서리에 걸려 올이 쭉 나가거나, 새로 산 립스틱을 바르다 반으로 뚝 부러진 정도의 사소한 불행이라면 액땜을 했다고 생각하며 깊은 안도감을 느끼며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파리에 여행갔을 때의 일이다. 신변잡기가 복잡하여 도피식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1인용 스튜디오를 빌려 숙소를 해결했는데, 여행 전부터 호스트와 궁합이 잘 맞질 않았다. 꽤 비싼 돈을 주고 예약한 숙소였건만 복잡한 비밀번호에 열쇠를 밀어넣어야 열리는 문, 낮이나 밤이나 칠흑같이 어두운 숙소의 복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1월의 강추위에 라디에이터 하나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내 어떻게 온도를 올리면 되는지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라는 게
" 방명록 안 읽었니? 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방명록에 적어놓지 않았니? 너처럼 유난스러운 게스트는 처음이구나."
이것도 영어가 아닌 불어로 메시지를 보내 번역기를 돌려서야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게 파리에서의 첫날 밤 기억이다. 나는 그 때 마음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름다운 파리의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무거운 걱정과 불안을 안고 걸었다. 그런데 한 3일째 되던 날 밤 샤워를 하다가 샤워기 헤드를 부러뜨렸다. 온몸에 비누칠을 한 채로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고쳐보려 노력했지만 한 번 부러진 샤워기 호스는 피리 소리에 조종당하는 코브라처럼 욕실 내에서 마음껏 꿈틀거리며 거센 물줄기를 뿜어낼 뿐이었다. 더군다나 다음날은 20만원짜리 몽생미셸 투어를 예약해 놨기 때문에 새벽 여섯 시에 집에서 나가야 했다. 눈물을 머금고 호스트에게 연락을 했다.
"사만다, 정말 미안해요. 샤워기를 고장냈어요. 수선비용은 얼마가 됐든 물어낼게요."
그리고 나는 다음 날 몽생미셸행 버스를 탔다. 어이없는 게 새로운 걱정이 생기니 이전의 걱정과 불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사만다가 샤워기를 잘 고쳐주기만 한다면 세상에 문제될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걱정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걱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걸.
오랜 해외여행을 다니며 깨달은 인생의 진리 중 하나는 바로 없어도 되는 물건의 마지노선을 정해놓는 것이다. 주로 유럽으로 여행을 다녔기에 여행 내내 소매치기가 걱정이었다. 초반에는 복대, 여권, 등산용 카피바라에 핸드폰 고리에 줄을 연결하고 가방은 항상 외투 안쪽으로 메고 다니며 시간날 때마다 물건이 잘 있는지 확인을 했는데 그러다 보니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 눈 앞에 있어도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 여행을 다니다 보니 이건 즐거운 여행이 아니라 물건 잃어버리지 않기 챌린지 같았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는 그냥 과감하게 마음을 놓기로 했다.
"핸드폰이랑 여권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잃어버려도 상관없어."
물건을 확인할 때도 딱 그 두 가지만 있는지 확인하고 미련없이 가방을 닫았더니 안절부절하는 시간도 줄어들고, 훨씬 더 여유롭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그 때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살면서 필요한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으며, 그것만 지킨다고 하면 나머지는 없어도 큰 문제 없다는 것을.
지금도 걱정, 불안이 삶을 지배할 때, 불행이 온통 삶을 잠식할 때면 나는 생각한다. 이보다 더 나쁜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그렇다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지켜진다면 내 삶은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냉소적인 성격은 이럴 때 꽤 도움이 된다. 언제나 좋은 일만 일어날 수는 없으며, 내 인생은 꽃길보다는 돌길이 더 많을 것이고, 그렇다 할지라도 내 삶이 무너지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