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연솔 Mar 04. 2023

가만한 날들

가만히 앉아서 가만히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와 태양의 움직임을 쫓는다. 가만한 날들이 영원히 이어지리라는 착각 속에 머물러 본다. 슬픔도 가만하고 분노도 가만하다. 나를 나로써 인정하고 다른 사람이 되지 않겠노라 다시 다짐한다. 외로움도 억울함도 모두 나의 것이다. 울컥하고 쏟아져 올라오는 비린 토악질 같은 슬픔을 도로 집어넣지 않고 끄집어 올린다. 신물이 날 때까지. 끝까지 가보자.

그가 두렵다고 말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두렵다고. 죄를 지은 것도 없지만 죄를 빚진 사람처럼 피하게 된다고도 말했다. 배신감이 너무 크면 두려움이 되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명료하게도 '버려질까봐 두려운 것이군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덧붙여서 실제로 버려지기 까지 했으니까요. 라는 말에는 면역력이 없었다. 뻔한 표현이지만 감정이 물밀듯 요동쳤다. 명백한 확인사살 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버려졌다. 다 큰 사람도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증명할 수 있었다. 쓰레기를 버리듯 나의 믿음은 그렇게 폐기되었다. 길바닥에 떨어진 껌 자국들이 나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밟히고 밟혀 신발자국이 잔뜩 묻은.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 다는 명제만큼 무서운 말이 또 있을까. 탄생한 모든 것들은 소멸을 수반한다. 게다가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것이 우리를 벌벌 떨게 만든다. 그렇다면 세상에 태어난 사랑만큼 버려진 사랑들이 있을 것이다. 수 없이 많은 사랑을 말하는 동시에 수 없이 많은 사랑을 버린다. 그렇게 버려진 사랑은 분리수거도 못된다. 그저 덕지덕지 오염된 추억이 묻은 채로 여기저기 나뒹군다.

뺨을 갈기는 바람처럼 추억은 늘 그렇게 여기저기 뒹굴다가 나를 할퀸다. 버려진 사랑도 그렇게 언젠가 나를 할퀸다. 가만히 있는 나를 뒤흔들고 송두리째 뽑아갈 듯 강한 바람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가만가만히 체를 들고서 어떤 것을 걸러낼지 살핀다. 가끔은 헷갈린다. 무얼 거르고 무얼 간직할지.

그래, 나는 가만히 버려졌다. 가만히 있었는데 버려졌다. 혹은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버려졌다. 무엇으로 읽든 상관없다. 무엇을 쓰든 진실이었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믿을만한 사람한테 버려졌다. 가만한 날들에 떨어진 폭격이 마음이 아프다. 더 부시고 부셔서 폐허가 되어버리든지 잘게 조각나든지 했으면. 이렇게 가만한 날들에 종말을 고하고 싶다. 이제는 부디 안녕히 사라져 주길 바란다.

이번에는 거르지 않겠다. 미련이 덕지덕지 붙은 이 사랑을 산산 조각내어 가만한 날들 곳곳에 비수를 꽂을 생각이다. 비록 가슴이 너무 아프겠지만 도망친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을 가만히 기억하며 그렇게.

작가의 이전글 결국, 사랑하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