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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Jan 30. 2023

결국, 사랑하는 것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요즘 계획대로 움직이는 삶에 대하여 생각해보곤 한다. 매일 아침 오늘 해야 할 일을 스케줄러에 적어본다. 적는 시간은 꽤나 신중하다. 이전에는 해야 할 일을 적어나가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아마 해야 할 일과 실제로 해내야만 하는 일을 별개로 인식해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스케줄러에 적은 것은 아주 사소할지라도 목숨같이 지켜보려 하고 있다. 그렇기에 한 줄을 적으려다가도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몸이 피곤해서, 예상치 못한 약속 때문에, 아니 다 필요 없고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계획을 못 지키는 것에 대하여 구구절절 이유를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수립하고 이행한다. 좀 더 깔끔한 삶을 지향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렇기에 적었으면 지켜야하는데,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내가 나에게 하려는 것은 아닌지 고심하는 것이다.


계획대로 움직이는 삶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삶을 본인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거대한 하루의 흐름 속에서 그저 어린아이처럼 내던지듯 던져진 채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떠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방향성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삶을 이끌어가는 주체임을 다시금 인식하게 해준다. 그리하여 하루의 일과에 매몰되기 보다는 하루를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 고민하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떠한 영역에 넣을지. 공적인 시간은 무엇이며, 나를 위한 시간은 무엇인지. 달려야 할 시간과 숨 돌릴 시간을 나누는 기준들. 작은 일들이 모여 하루를 설계하고, 그 작은 일들의 실천을 쌓아가서, 마침내 삶의 방향성으로 배치하는 과정은 하루를 통제하는 힘을 넘어서서 결국엔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맞닿는다.


그리고 너무나도 구태의연한 말이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구태의연하고 유치하다고 해서 말을 아끼고 싶지 않다. 요즘 나의 마음이 그러하다. 당연한 말일수록 스스로에게 곱씹어서 긍정적인 세뇌를 시키는 작업을 아끼지 않는다.


나는 결국 사랑할 것이다. 나와 관련한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아낄 것이다. 사랑하기 위한 과정까지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도. 때로는 모든 것이 거짓말 같더라도. 모두가 나를 속이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어느 날은 사랑으로 끝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의심이 불쑥 끼어들 수도 있다. 그래도 사랑할 것이다.


그리하여 불안하여 미칠 것 같아도 늘 한 줄을 적고 실천에 옮긴다. 코웃음 칠만한 아주 작은 일도 해내고 나면 한 줄을 긋고 혼자서 뿌듯해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약속을 저버리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어떤 일이 생겨도 반드시 지켜내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나는 좀 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되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 편 계속 속삭이는 것이다. 어차피 그 끝은 어둠이라고. 순간 모든 불이 꺼지고 두려움이 발걸음을 급히 한다. 그래도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좋은 한 줄을 계속해서 쓴다.


남은 삶을 벌이라 생각하며 대충 살아가던 지난날의 나를 뒤로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한 걸음씩 노력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은 바로 실천하는 것이다. 그냥 실천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서 실천하는 일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미래에 자신이 있다는 듯(자신감이든 미래에 여전히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로 있다고 생각하든) 그저 믿고 나아가는 것이다.

최근 상담에서 색으로 표현한다면 미래는 무슨 색이 될 것 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과거에는 검은색처럼 갑자기 암전 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검은색은 아주 깜깜하다고.


현재에는 한참 밝아졌으면 참 좋았겠지만 솔직하게 아주 밝지는 않고 회색정도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가끔 검은색도 드리울 때가 있지만, 아예 검은색이 아니고 깜빡깜빡 거리다 마는 느낌이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솔직한 답변이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말했다. 죽음이 꼭 검은색을 상징하진 않는다고. 죽음은 핑크색일수도, 알록달록한 색깔일수도, 파스텔 톤 일수도 있다고. 선생님은 아마 검은색이라는 표현이 갑자기 닥쳐올 죽음을 두려워하는 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을 눈치 채신 것 같았다.


죽음이 다른 색 일수도 있다는 표현은 너무 따스했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 여전히 검은색이어도 상관없다는 것.


다만, 갑자기 죽음이 다가오더라도 이제는 결국 그 죽음을 사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서 도망쳐 도피처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삶을 사랑해 줄 용기가 조금씩 샘솟고 있다. 이것은 아주 큰 변화이다. 어쩌면 정말로, 결국엔 나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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