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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솔 Jun 30. 2023

쓰이는 나날

일기를 쓰고 있다. 어떤 날은 쓰여지는 나날이 되고, 어떤날은 쓸날이 딱히 없는 나날들의 연속이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에서 주인공 조엘은 자신의 일기장을 보여주기 창피해 한다. 모두 'empty'. 비어있는 나날들 뿐이라고. 딱히 특별한 이벤트도, 감상할만한 거리도 없는 심심한 일상일 뿐이라고 그렇게 말한다.


쓰여지지 않는 나날은 모두 심심한 나날일까? 확실히 반은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내 일기를 증거로 삼아 한번 샅샅이 뒤져보니 1~4월은 거의 모든 나날이 쓰여져있었다. 지나고 보면 지금과 다르지 않은 나날들의 연속이다. 좌절하고, 더 깊이 좌절하고, 다시 수면위로 올라오고, 또 평범해지다. 이것은 나의 일상의 전부를 축약한 문장이다. 이게 전부인데 그걸 하루하루 쪼개서 무언가 열심히 기록했다.


더 깊게 파고드니, 무얼 먹었고, 누가 나를 속상하게 했고, 무엇이 나를 기쁘게 했고, 컴퓨터 바탕화면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하루의 파일들을 잘도 모아 알집처럼 꽉 묵어두었다. 그 무게감이 마치 지난날을 열심히 살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걸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쓰여지지 못한날에도 나는 치열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기장에 가장 많은 공백이 생긴건 6월이었다. 6월은 처참한 수준이다. 열손가락을 다펴도 그 날들을 채우지 못했다. 고작 다섯손가락을 겨우 채워넣은 일기장이 놓여있었다. 수많은 공백이 불쌍했다. 그리고 그것은 알게모르게 마음에 죄책감이 찾아오게 만든다. 무언가 치열하기 살지 못했다는 무언의 압박감. 기록은 무엇을 위해서 하는가. 추후에 돌아보기 위해서 기록을 하는 사람도, 무언가 털어놓고 싶어서 기록을 하는 사람도, 변화의 추이를 살펴보기 위해 기록하는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가지각색의 기록의 이유들 속에서 나는 나를 위해 기록한다.


미래의 내가 좌절할 때 과거의 나를 꺼내보면서 너 이때도 좌절했었어. 그치만 지금 또 과거의 일기를 보면서 아직 살아있지. 계속 살아있을 수 있단다. 하고 용기를 심어주기 위한 작업이 나에겐 기록이다. 그리하여 멋지게 쌓아올리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에게 검사 받는것이 아니니까. 나만 참고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러니 기록하지 않는 나날은 그냥 기록하지 않은 나날인 것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5~6월은 자격증 시험이 두개나 있었고, 회사의 굵직한 행사도 더러 있었다. 무언가 신경쓰이는 일이 있으면 밥도 거르고, 그마저도 억지로 먹으면 체하는 나에게 멀티는 불가능이다. 그래서 두달의 일기는 도저히 쓸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일기를 매일 써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서, 쓰지 못했다면 이유를 역추적 해본다. 이렇게 바쁜일정이 있는 구간이거나, 혹은 혼자 동굴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이거나 이유는 다양하다. 그 이유를 안다는 것만으로도 쓰임의 소임은 다했다고 생각한다. 공백의 시간만큼 무언가 힘들었던 거구나. 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무언가 힘들때 다른 무언가를 돌아볼 여력따위는 없는 나의 심리적 체력에 대해서도 또 한번 안타까워 하기도 하고.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쓰이는 나날의 축복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무언가 쓸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심리적 체력이 온전하진 못하더라도 어느정도 채워져있다는 뜻이되며, 그것은 심신이 안정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얼마전 친구와 서점을 거닐며 이런말을 한적이 있다. '책을 읽는 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야. 다른게 아니라, 마음이 안정되어야 책을 읽을 수 있거든. 걱정으로 가득차있다면 책 따위는 읽을 수 없지'


일기장에 공백이 늘어나던 만큼 나는 책을 실제로 손에 잡지 못했다. 책만 손에 잡으면 걱정이 두둥실 뭉게뭉게 떠올랐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걱정과, 감당할 수 없는 걱정은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을 것이다 각자.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 앞에서는 누구나 힘이 짓눌린다. 힘이 짓눌리면, 몸이 짓눌리고, 몸이 짓눌리면 정신이 짓눌린다. 그렇게 짓눌리다 보면 책은 활자를 그저 눈에 담는 행위에 불과해진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다 보니 알게 된것이다. 쓰는 일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쓴다는 것도 적당히 짓눌려야만 가능하다. 압도당한 슬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는 누구나 글을 쓰기 쉽지 않을 것이다. 돌려말하면 지난날의 나는 슬픔에 압도당하고 그로인해 절체절명의 위기의 심리상태에 놓여있었으니 글 따위는 쓸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용기내어 쓴다. 글을 쓸 상태를 열심히 만들었다. 빨리 글과 책과 만나고 싶어서 나름의 노력을 했다. 격렬하진 않지만 꾸준히 산책을 했고, 일부러 청소하는 시간을 늘렸으며, 약도 증량하여 꼬박꼬박 챙겨먹었다. 상담선생님의 말은 웬만하면 지키려고 노력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하고 나머지는 자연의 섭리에 맡기는게 맞다 싶어서 기다렸다. 봄에서 여름이 올때까지 그렇게. 봄만되면 모든 소생하는 것들의 희망찬 기운에 짓눌려 찌질이가 된다는 글을 쓴적이있다. 그러자 친구가 글을 읽고는 기쁘게도 초여름 날씨가 찾아온다며 잘 이겨냈다고 말해주었다. 사실 그때도 난 이겨내지 못했지만 마법처럼 초여름이 찾아오길 빌었다. 떨리는 마음이 진정이되길, 슬픔에 짓눌리지 않고 여름 자락에 내리는 시원한 비처럼 모든걸 흘려보내길.


6월 말의 오늘 7월의 초입앞에 서서 본격적인 여름을 두려워 하며, 한편으론 달리기 출발선에 선 아이처럼 설레하며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 7월이 되자마자 생일이 있는것을 싫어했다. 여름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니까. 그런데 이번 여름은 좀 뭔가 다르다. 내가 뭔가 다르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생각하는대로 이뤄지길 바라면서. 태어난 것을 축복하진 못하겠지만, 너무 미워하지 않기를 이번여름은 바라본다. 그리고 많은 여름의 기록을 내가 남길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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