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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 Sep 04. 2023

죽어가는 세계관 되살리기 1

아직 끝나지 않은 아마추어의 보고서




하루라도 읽거나 쓰지 않을 때 찾아오는 혼란이 있다. 일주일 단위로 빠르게 흘러가는 삶이 긴 사색을 방해하기도 한다. 예민함과 불안함과 혼란스러움이 새로운 생각을 만들고, 글을 쓰는 사람은 그걸로 연명한다. 그 목숨줄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생명력에 언어 감각과 글쓰기 능력이 조금 보탬이 된다. 그리고 늘 우연일 수도 필연일 수도 있는 어떤 계기의 도움을 받는데, 주변에 사건이 넘치고 머릿속에 생각이 끊이지 않을 때조차 정체 상태에 놓이는 이유는 다 가졌음에도 정작 ‘나’를 가지지 못한 데서 오는 부작용 때문이다. 그래서 몇 달 전 야심 차게 썼던 <젊은 아마추어의 추상적 보고서>는 아직도 완벽한 결말을 만나지 못했다.


그동안 롤모델로 삼았던 작가들이 수없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사랑하려면 목표가 같아야 한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해줬어도 감수성의 주파수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많은 작가들의 세계관에 더 이상 공감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자기 세계를 가지지 못하고 소신껏 반응하는 법을 몰라 방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책을 읽을 때까지는 기대감에 부풀었다가 덮고 나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만 되풀이한다. 의미 없는 쳇바퀴 속에서 기력이 떨어진 가냘픈 동물이 우주의 가장 강력한 힘인 관성으로부터 과연 빠져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분명 그 쳇바퀴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만 해도 ‘전 세계를 내 손 안에’ 같은 대범하고도 무모한 꿈을 꿨을 텐데,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마주치는 건 같은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돈 세상이다. 결국 허탈함에 모든 걸 다 포기하고 그냥 ‘내 세계’만 잘 쥐고 있자고 마음을 바꾼다. 그런데 그것도 대체 뭐란 말인가?


숲을 밀거나 흙을 쌓아 평평한 빈 땅을 만들고 그 위에 독자적인 문화를 세웠던 과거의 문명인들에게는 그들의 기준에서 볼 때 완벽한 아이디어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권력욕과 과시욕이 원동력이 되어 고민할 필요도, 멈출 필요도 없이 무조건 크고 화려하게 만들기만 하면 됐던 걸까? 그들과 비교해 너무 많은 것들을 알게 된 우리에게는 이제 그들이 가졌던 만큼의 상상력이나 창의력은 없는 듯하다. 더 세밀해진 자유 위에 거대한 토대를 마련하는 일은 벅차기 때문이다. 대신 요즘의 세계관은 도시나 건물을 만드는 게 아닌, 둔탁한 무언가에 부딪히고 깨져 튕겨 나온 파편들을 모으는 것으로 진화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자아라는 것도 반작용의 역사다. 처음부터 오로지 혼자 힘으로 창작할 수 있는 건 없다. 어쩌면 창작이란 만든다는 기분으로만 존재하고 실제로 새롭게 만들어진 건 없는 허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작가는 결과나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그 감각을 어떻게든 현실화하려 애쓴다.


아름다운 문장은 본능적이면서 너무나도 필수적인 요소다. 그래서 작가는 언제나 언어의 질감과 문학성에 대한 욕구를 풀 기회를 노린다. 하지만 주제에 의존하는 글은 그 기회를 빼앗는다. 그럴 때마다 온갖 인습에 저항해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면 어김없이 부담감이 덮쳐온다. 호기롭게 바다로 나섰지만 새로운 파도에 휩쓸려 다시 육지로 떠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작고 납작한 서핑보드 하나만 가지고 위험한 파도를 타는 법을 익혀야만 한다. 그때 지금까지 쓴 글들이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건 문제도 아니다. 더 이상 글로 쓸 만한 생각이 없는 상황이 가장 위협적이다. 그리고 완벽한 기승전결과 뚜렷한 주제의식이 없으면 제대로 된 글이 아니라는 헛된 잣대가 공기의 흐름을 지배한다. 그래서 ‘자기만의 방’을 가졌어도 그 공간에 대한 주도권은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나’를 가지지 못했음은 성공과 명예라는 지표로 즉시 나타난다. 그것은 팔리지 않는다는 결과가 무능함이라는 평가로 이어지는 잔인한 심판대다. 하지만 아주 조금의 조회수가 증명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그러기에는 표본이 너무 부족하다). 세계관을 형성하는 건 작가의 반작용이지, 독자의 반작용이 아니다. 그러니 아마추어가 충분한 보상을 얻을 때까지 버티며 가져야 할 자세는 글쓰기의 목적이 소통이더라도 오히려 독자를 떠올리지 않고 서점의 매대를 상상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횡설수설한 혼잣말로 만족하라는 뜻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가장 조용하게 이기적인 사람이다. 이미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잊지 않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상기시켜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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