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감수성의 회복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며 어떤 작가가 되겠다는 포부를 담은 글을 완성하고도 작가들의 에세이에 대한 집착을 끊을 수 없었다. 난 여전히 직설적인 목소리들을 갈망한다. 내 이야기의 주인공은 언제나 작가였다. 가상의 할아버지에 관한 일화를 기록하는 작가와 어느 날 갑자기 외계인과 공존하게 되면서 출판업이 부흥한 세계도시를 거니는 작가, 신이 된 인공지능의 예언을 인간 언어로 번역해 먹고사는 작가 등 내가 만들어낸 주인공들은 모두 글을 쓰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난 작가들의 에세이를 읽으며 그들처럼 되는 법을 알고 싶었던 게 아니라, 단 한 줌의 꾸며낸 이야기도 없이 글을 쓰는 사람의 아주 내밀한 감정을 읽고 싶었다. 특히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이 궁금했다.
고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생각하다가, 어린 시절 친구들로부터 놀림받거나 버림받았을 때 무엇을 필요로 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난 감정적 위로나 현실적 대안을 넘어선 큰 개념을 원했다. 상처 위에 약을 바르거나 따뜻한 입김으로 치유되는 것 말고 이 상처가 생기게 된 원인을 아는 게 중요했다. 상처가 얼마나 쓰라린지는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이 상황, 즉 타인의 행동과 나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는 데서 오는 혼란이 더 고통스러웠다. 쉽게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에 꽂힌 건 이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어떤 명제가 참임을 긴 풀이 과정을 통해 증명할 때 느꼈던 희열을 되풀이하듯, 목적을 가지고 스스로 발견한 개념을 이해시키는 일에 본능적으로 끌린다.
그러니 이런 사고방식에 정답을 요구했던 시도는 얼마나 헛된 것이었을까? 발목에 묶인 아리아드네의 실은 미궁을 빠져나가게 도와줄 길잡이인 동시에 문제 해결을 한 가지 방법으로만 이끄는 권력이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는 실이 없어도 날개를 만들어 탈출했던 다이달로스처럼 정답에 집착하는 일에 의문을 던진다. 그렇다고 무작정 벽을 부수거나 원인 제공자에게 책임을 요구해 고통을 없애는 방식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다이달로스로부터 배울 점은 수평적 공간에서 수직 방향으로 날아오르며 다른 시점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점의 전환도 효과적인 변화의 방법이라고 할 때, 과연 저항과 해방만이 유일한 길일까?
지금의 세태는 혼란을 혼란 그 자체로 놔둔다. 사람들은 자극적이고 집요한 분노를 쏟아내거나 소비하기만 할 뿐, 고통을 제대로 다루는 건 원하지 않는다. 수면 위로 드러날까 두려워하고, 대처하기 힘드니 아예 없는 척 무시해 버린다. 낭만은 그 고통을 덮어두는 데 사용하기 딱 좋다. 그 중간에 낀, 썩어가는 연못과 단단한 겉껍질 사이에 갇힌 내 몸은 고통의 물에 점점 젖어가고 있고, 손은 낭만을 꽉 붙잡고 버티는 중이다. 거기서 이도 저도 못하는 난 평생 미간을 찌푸린 횟수만큼 눈물을 흘렸다. 외부 세계에 대한 비판 의식과 내면의 감정이 충돌한 결과다. 그런데 이렇듯 일방적인 모순의 괴롭힘이 내게 근육을 붙일 기회를 주고 있다. 심지어 자신을 마음대로 이용해도 좋다고 관대하게 허락하기까지 한다. 손을 놓고 그대로 고통 속으로 잠식될 수도 있는 상황에 찾아온 관점의 전환은 새로운 생존 방식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제는 무섭도록 차갑고 날카로운 눈으로 고통을 응시하는 비정함과 그 고통을 먼저 알아보고 거기에 이름을 붙여 다른 사람들도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인간성을 결합해 보라고 재촉한다.
생각보다 돈이 지나치게 중요하다. 돈을 벌지 못하면 자신감이 떨어지고,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해도 목표는 멀어 보이고, 또 그 목표는 돈만 있으면 너무나도 간단히 이룰 수 있다. 그리하여 누구나 책을 낼 수 있지만 정작 책을 읽는 사람은 줄어드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가장 바라는 건 새로운 지식이 아닌 고유한 생각과 유기성, 문학성이다. 다른 말로는 활자에 대한 기대다. 난 그런 일반적인 기대를 훌쩍 뛰어넘고 지나친 엄밀함과 권력화에 반박해 차가운 감수성의 회복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