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둘러앉은 원탁 위의 화두
지난 월요일, 일 없는 청춘들 셋이서 1박 2일 일정으로 비수기 호캉스를 떠났다. 붐비지 않는 곳에서 오랫동안 수영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 날짜가 가장 적절했다. 작고 가벼운 가방, 크고 무거운 가방, 그리고 중간 크기와 무게의 가방을 인 채 긴 시간 대중교통을 타고 가는데도 아직 맛보지 않은 여행에 대한 설렘이 온몸을 흔들어 깨웠다. 우리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피로라는 것이 존재하기라도 했냐는 듯 지체할 새 없이 바로 물로 뛰어들었다.
13년 만의 수영이란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감이 완전히 물먹은 사건이었다. 난 그동안 호흡하는 법도 잊었고, 발차기와 스트로크에 필요한 근육도 잃었다. 음파음파가 아닌 습하습하를 반복하는 바람에 소독물과의 리듬이 영 맞지 않았다. 그 상태로는 열심히 팔을 휘젓고 다리를 움직여도 숨이 부족해 멀리 나아갈 수 없었다. 물속에서 무게를 잊고 자유로워지고 싶었지만, 코와 귀로 기분 나쁘게 침투하는 물이 감각을 꽉 막히게 했다. 그리하여 딱 한 시간을 기점으로 진이 빠져버렸다. 결국 우리는 하루종일 수영을 하겠다는 다짐을 접고 물 밖으로 나와 씻고 침대 위에 누웠다. 너무나 피곤하고 몽롱해서 계속 물속에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정신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모두가 그 느낌에 공감했다.
아가미가 바짝 마른 물고기에서 폐로 숨 쉬는 법을 터득해 육지 생활에 적응한 새로운 종으로 진화했다. 13년의 공백이 의미하는 바는 그러하다. 지금은 아주 어릴 때와 똑같은 조건을 가질 수 없다. 성장기를 거치며 더 크고 무거워진 몸을 제어하려면 더 강한 힘과 체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나이에 맞는 책임감과 시선에 대처하는 능력도 길러야 한다. 난 특히 몸 안쪽의 살들을 내보이는 것에 도전하는 심정이었다. 그건 곧 평가가 두려워도 더 깊은 민낯을 보여주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해치워야 할 억눌린 욕망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던 그 의식을 통과하고 훨씬 자유로워진 다음에는 남은 여행을 즐기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서로의 민낯을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같은 여행에 포함된 모두가 진지한 대화의 기회를 노렸다. 그때는 이미 많이 지쳐서 더 이상 짜릿함을 추구하지도 않았으니, 감기는 눈을 억지로 붙들고 새벽까지 깨어 있었던 건 순전히 기대감 때문이었다. 우리는 원탁에 둘러앉아 축축하고 밀도 높은 주제들이 나타나 주기를 기다렸다.
첫 번째 원탁 위에는 와인과 각종 안주가 올라와 있다. 전혀 건강하지 않은 맛의 쾌락을 즐기면서 호캉스다운 휴가를 만끽하는 듯했다. 분명히 처음 몇 모금에는 그런 희열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알코올이 무조건 진지한 대화를 발생시키지는 않는다(물론 그 정도로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힘에 의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무언가를 먹고 마시느라 바쁜 입으로 동시에 말할 수 없고, 오락을 탐닉하느라 바쁜 눈으로 의미 있는 진실을 발견할 수도 없다. 호텔 방에서 TV를 틀었던 건 패착이었다. 쉴 새 없이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는 것만이 그 날 밤의 유일한 활동이었다.
두 번째 원탁 위에는 커피 한 잔과 에이드 두 잔이 놓여 있다. 밤에 먹고 또 조식을 배불리 먹어 점심을 건너뛰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왔어도 여행을 거기서 끝낼 수 없었다. 그래서 조금의 아쉬움도 남기지 않기 위해 번화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지하의 습하고 어두컴컴한 카페로 들어섰다. 이제야 이 여행의 멋들어진 결말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중요한 이야기를 밀린 숙제처럼 해치우려 하지만, 그러기에는 여독으로 이미 지친 상태라 각자의 고민과 진행 과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결국 두루뭉술한 비전만 오갔다.
아직 완전한 ‘자기 것’이 없는 친구들끼리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분명하지 않고 두루뭉술한 비전에 그칠 수밖에 없다. 무수히 많은 과정만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결과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세상에 우리 각자의 자리가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한 인간으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번지기 쉽다. 그런 불안 때문에 어떻게 하면 더 부지런하고 균형 잡힌 일상을 통해 지금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지 궁리한다. 어쩌면 일 없는 청춘들이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주제는 무기력을 타파하는 물리적인 방법에 관한 것뿐일지 모른다.
자신의 역할이 아닌 위치만 생각했을 때 폐단이 발생한다. 발을 딛고 선 땅은 무시한 채 오르지 못한 산을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본다. 풀린 신발끈을 다시 메려면 우선 허리를 아래로 숙여야 하고 곧 시선이 옮겨가면서 자연스럽게 땅이 보일 텐데, 많은 이들이 그 과정조차 겪지 못한다. 그러나 새까만 등잔 밑에도 진실은 반드시 있다. ‘일’은 무언가를 대신 해주고 그에 따른 보수를 얻기 위해 존재한다. 작가가 대신 이해하고 해석하고 경험하고 반성하고 행동하는 사람인 것처럼, 모든 직업인은 대행인이다. 그렇게 심각하고 복잡한 개념은 아니다. 이 간단한 개념을 실전에 적용하려면 유연하게 굽히는 허리와 매끄럽게 돌아가는 눈동자만 있으면 된다.
모두가 깊이 공유하고 공감하는 공통의 주제가 단순한 수다를 양질의 대화로 이끈다. 서로의 취향만을 묻는다면 대화가 온통 호불호의 문제로만 귀결될 수 있다. 그건 활자의 도움을 받지 않는 대화의 한계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치에게는 자신을 뽐낼 수 있는 무대가 극히 드물다. 단 한 줄기의 조명이라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의 입장을 헤아려 우리는 원탁 위에 다른 걸 올려놔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시 한 편을 바쳐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