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운 Nov 13. 2023

졸작이라도 필요한 이유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두 번 본 후기

졸작(拙作): 솜씨가 서투르고 보잘것없는 작품


미디어 그 자체를 비판하는 건 한계에 다다랐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우리의 정신을 뒤흔들고 현혹하는 미디어에 있다는 똑같은 결론만 끝도 없이 찍어내는 중이다. 차라리 작품 속 내용이 훨씬 다채롭다. 이제는 발톱에 힘을 풀고 불가분의 관계와 파급력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문화를 대하는 태도가 뒤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넷플릭스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 대한 감상문을 강제로 써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기분 좋은 채찍질에 들떠 8개월 전에 봤던 영화를 다시 화면 위에 띄웠다. 보통의 시청자라면 두 번 이상 시청하지 않을 이 졸작에서 어떤 메시지를 끌어내야 할까?


우선 잡다한 대화들과 인터넷에 널린 후기들을 통해 특정한 인간상과 사회상에 관한 논의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나치 군의관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북클럽 회원에게 맡긴 뒤 정의로운 행동에 몸을 던진 엘리자베스는 이타적인지 이기적인지, 또는 영국 영토인 건지 섬이 나치에 점령당했던 시절 결성된 북클럽에 관심을 보였던 작가 줄리엣이 왜 엘리자베스를 궁금해했는지 등의 질문들이 토론 주제가 된다. 엘리자베스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그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시청자는 자신의 경험과 시각에 따라 줄리엣의 선택을 좇으며 저마다 완전히 다른 근거를 내놓는다.


한편으로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줄리엣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개연성을 위해 어정쩡한 로맨스를 끼워 넣은 격이었고, 궁금증이 정착을 바라는 마음으로 번지는 과정이 허술했다. 영화에서 사랑은 이제 모두 알 만한 도구다. 그 도구를 왜, 그리고 언제 쓰는지 이미 들통이 났다. 너무나 친절해서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서사지만, 줄리엣이 건지 섬을 떠날 수 없었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억지 사랑에 밀려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했다. 그녀가 사랑에 빠졌던 도시 애덤스는 전쟁과 침략의 고통을 견뎌내고 그 과정에서 소외된 것들(사람이든 사물이든 사건이든)을 기꺼이 품은 인물이다. 그는 그 자체로 어떤 특징이 있는 인물은 아니고, 북클럽의 다른 회원들과 비교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건지 섬을 가리키는 여러 상징 중 하나일 뿐이다. 그 말인즉슨 줄리엣이 사랑에 빠졌던 대상은 건지 섬인 것이다.


줄리엣이 영원히 건지 섬으로 돌아오지 않을 엘리자베스의 빈자리를 대신하게 된 진짜 계기는 동질감이다. 북클럽 회원들 간의 숨겨진 이야기를 글로 쓴 이유도 동질감이 분출을 필요로 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지나치게 깊숙이 닿아버리면 그 순간부터 연결고리를 쉽게 끊어낼 수 없다. 우리는 동질감이라는 것을 자주 잊고 살기 때문에 단순한 감상에서 그치지 않고 유대감으로 확장하려면 한쪽 면에만 엉성하게 발린 접착제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개념을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


내가 감히 졸작이라 평한 이 영화는 지치지 않고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교류해야 할 이유를 일깨우는 데 성공했다. 결국 행동은 몇 마디의 대사가 이끈다. 비평가는 창작자보다 책임을 덜 지지만, 그만큼 힘이 부족하다. 세상을 바꿀 능력까지도. 이것이 변화를 꿈꾸는 비평가가 느끼는 무력감이자, 건설적인 대화를 위해 졸작이라도 필요한 이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낙원은 해피 엔딩이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