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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 Nov 20. 2023

조커의 악명에 밀린 다크나이트의 사명

워너브라더스의 100주년을 기념해 영화 <다크나이트>가 재개봉했다. 이제는 마치 0순위로 서로를 지칭하는 듯한 히스 레저와 그가 연기한 조커는 영화 안팎에서 큰 존재감을 과시한다. 하지만 난 유명한 스타 빌런의 그림자에 가려진,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들어 내고 크리스찬 베일이 빚어낸 배트맨의 연대기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영화관에 가는 대신 다크나이트 3부작을 연이어 본 뒤에 그 세 작품을 하나로 잇는 진실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물음은 이것이다. 권력과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에 위험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영웅의 모습을 훔칠 수 있을까?


히스 레저의 조커가 크리스찬 베일의 배트맨보다 더 각광받는 이유는 아마 테러를 직접 실현한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심리에 있어 가장 잔인한 악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금방 떠오를 만큼 아주 밀접하고 생생한 악인 테러리즘이다. 조커는 여론과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권력의 횡포에 저항한다는 명목으로 보통 사람들의 야만을 날카롭게 깨운다. 간혹 제대로 된 대상을 응징하는 것처럼 보일 때면 악도 꽤 쓸 만한 도구라는 섬뜩한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악도 사상을 품고 있고 논리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도덕관념을 잃거나 허무주의에 빠졌을 때 언제든 그것에 설득당할 수 있다. 특히 배트맨이 자신의 후임으로 지목했던 정의로운 검사 하비 덴트는 선과 악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들에 쉽게 영향받고 또 그로 인해 희생당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았다.


이렇듯 페르소나는 복제된 것이다. 우리는 늘 투페이스로 변한 하비 덴트처럼 반쪽짜리 선과 반쪽짜리 악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간다. 이것이 가장 큰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는 문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선인인가, 악인인가?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보이는가? 객관적인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 자신의 눈으로도, 거울로도, 카메라 렌즈로도 볼 수 없는 나의 진짜 얼굴은 어떤 모습인가? 가면은 껍데기일 뿐이지만 그것만큼 내면을 정확히 가리키는 것도 없다. 브루스 웨인의 박쥐에 대한 두려움은 배트맨 가면으로 표출되고, 조커와 베인(톰 하디)의 가면은 흉터를 감추는 데 사용되지만 오히려 감춘 부분에 더 시선을 집중시키는 역효과를 낳는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공포를 느끼는 요인을 얼굴 위에 덧씌워 무기로 사용한다.


세 개의 시리즈에 걸쳐 나타난 악의 형상들은 하나같이 파괴적이다. 파괴는 대상을 가리지 않는 행위다. 세계를 0으로 돌리겠다는 아이디어가 모든 역사와 흔적을 지운다. 선과 악에 관한 기억,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했던 기록들까지도. 그리고 악당들은 파괴 충동이 선사하는 쾌락에 흠뻑 젖어 있다. 만약 그들이 어떤 장면에서건 한 번이라도 매력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그가 당신을 대신해 억눌린 욕망을 분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 카타르시스는 무법자의 일탈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 결과일 수도 있고,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그들이 무의식의 측면에서 해리성 인격 장애를 공유하는 현대인의 또 다른 인격이라는 점에서 기인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난 영웅도 현대 문명의 산물이라는 관점에서 그가 극단적으로 치달을 때, 즉 광기를 획득할 때 악당이 된다는 보통의 해석과 달리 영웅도 광기의 한 유형이라고 본다. 그가 하는 행동의 원동력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고, 그저 결과와 명예를 선망할 뿐이다. 다만 같은 광기를 지닌 영웅과 악당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들을 이끄는 감정의 출발점에 있다. 둘은 모두 분노를 연료로 타오르지만, 악당은 증오 속에서 태어난 반면에 영웅은 죄책감 속에서 태어났다. 누구나 조커 카드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듯이, 광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하지만 흉부를 압박하는 죄책감은 떨쳐버리고 싶은 감정이다. 이때 회개는 죄책감을 통째로 휘발시킨다. 그러면 죄책감이 정체성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에는 자신의 근간을 다 빼앗기는 셈이라 어쩔 수 없이 다시 죄책감을 붙잡는 선택으로 끌려간다. 그 불가항력에 저항하려는 인물은 블랙홀과 같이 강한 중력으로 빛을 빨아먹는 죄책감과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시소의 반대쪽에 정의감을 배치한다. 그래서 죄책감은 발목을 붙잡는 심연의 손길이면서도 그 힘에 맞서 앞으로 뛰게 만드는 추진력으로 거듭난다.


영화에서 브루스 웨인은 자신이 부모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그대로 굴복하거나 화살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 증오를 퍼붓지 않고 묵묵히 힘을 키웠다. 그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도 악을 처단하는 방법을 모색한 것처럼 죄책감은 책임감과 사명감을 심어주고 헌신할 대상을 점지해 준다. 그러다 그 대상의 범위를 점점 더 넓혀 마침내 세계와 자아를 공유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면, 한 인간의 개인적인 만족감 같은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결국 배트맨은 자기만족을 꾀하지 않고 보상심리를 저버린 순간 다크나이트가 되었다. 고로 영웅은 평범한 사람이 바라는 행복도, 악당이 추구하는 쾌락도 좇지 않는다. 영웅은 완전히 다른 꿈을 꾼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 결말을 맞을 때 브루스 웨인이 사라지고 공석이 된 배트맨의 자리를 존 블레이크(조셉 고든레빗)가 이어받는 장면에서 우리는 배트맨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에 어쩐지 마음이 놓인다. 고담 시는 평화로운 시기에도 언제나 전쟁의 조짐을 품고 있고, 그건 스크린 밖 현실 세계도 마찬가지다. 멸종하지 않을 고통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희망을 지키기 위해 계속 배트맨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려면 끝나지 않는 싸움이 필요하다(지루하지 않게 중간중간 크고 작은 승리들과 패배들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캐릭터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기를, 멈추지 않는 투쟁으로 서사가 끊기지 않기를, 변하지 않는 가치가 분명 존재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과연 그 길고 고단한 역할을 평생 수행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상징이 불멸하더라도 인간의 에너지는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말이다.


한창 왕성히 영웅 활동을 하다가도 행복이라는 인간적이고 어쩌면 이기적인 욕망을 품는 순간, 영웅은 인간의 지위로 떨어진다.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인 토마스 웨인이 “우리는 왜 떨어질까?”라고 말했던 것이 찰나의 회상으로 자주 등장할 때, 우리는 브루스 웨인의 욕망을 알아차릴 수 있다. 외로운 수련을 견딘 초인도 산에서 내려와 광장에서 사람들과 합류하기를 꿈꾼다. 그래서 죄책감이 쌓은 부채 의식을 충분히 덜어냈다고 느낀 시점에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었던 브루스 웨인은 원자 폭탄을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 떨어뜨리며 공식적인 죽음을 통해 자기 파괴를 택했다. 마침내 시민들 틈에 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섞여든 그는 그제야 테라스에서 편안한 한 끼 식사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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