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이라는 것이 인생에서 꽤나 중요한 문제라는 걸 며칠 전에야 깨달았다. 규명이 필요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라는 것도. 무언가에 돈과 시간과 체력과 사랑을 쏟아붓는 행위가 나의 필요와 지향과 욕망을 가차 없이 보여준다. 나의 어떤 면은 굳이 보고 싶지 않은데도 순간의 감탄사와 분주한 손가락의 이동 경로가 자꾸 숨겨놓은 모습을 들춘다. 덕질을 한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은 이유는 그런 무자비함에 대한 방어 기제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젠 덕질을 하는 ‘나’와 그냥 ‘나’를 구분할 수 없다. 둘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 몸이다.
2020년 3월 NCT 127에 입덕해 어느덧 내 덕질은 4년 차를 맞았다. 당시 발매되었던 <영웅>은 힙합과 알앤비를 통한 강렬함과 부드러움의 공존에 궁극의 비주얼을 첨가했다. 뮤직비디오를 처음 접했던 그때부터 나의 기존 세계가 파괴되어 좋은 의미에서 약간 정신이 나간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나온 정규 5집 <Fact Check>는 또 한 번의 도약이자 전환점이었다. 앨범이 발매되자마자 가사를 가장 먼저 확인하는 버릇을 억누른 채 이어폰을 꽂고 재생 버튼을 누른 뒤 눈을 감았다. 1번부터 9번 트랙까지 다 감상하고 나서, 127과 나 모두 어떤 정점에 이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음악은 데뷔 이래 가장 절정이었고, 그 음악을 완전히 이해하고 거기에 깊숙이 빠져든 나도 덩달아 절정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어떤 경지에 오르는 기분, 잠시나마 신을 흉내 내는 기분, 영감의 원천이 되는 기분, 꼭 당사자가 아니어도 경외를 통해 인간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려는 마음 같은 것들이 척수를 가득 채웠다.
종교를 버린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최상의 무언가는 이런 게 아닐까? 이건 결코 주접이 아니다. 가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는데, 어디를 가든지 그곳은 변함없이 세상이고 아무도 없다고 해도 자기 자신이 존재해서 괴롭다. 그래서 나는 현실을 짝사랑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만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지지는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중이다. 날 움직이는 감정은 아무리 부정해 봐도 결국 사랑인데(집착의 아름다운 버전일 수도 있다), 전에는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했었다. 요즘은 그게 아니라고 확신한다. 아무래도 공명과 경탄을 잘 구분해야겠다.
사실 전에도 아이돌 덕질을 했었다. 아직 자아라고 할 만한 게 없었던 청소년기와 20대 초반에 2세대 아이돌을 좋아했었다. 큰 소비를 자제하는 중인 지금과 다르게 그때는 콘서트며 팬미팅, 뮤지컬, 음악 방송, 지방 행사 등 출석할 수 있는 여유만 있다면 어디든 최애를 따라다녔다. 중소 기획사 출신이라 각종 시상식에서 기죽는 일이 없도록 투표에도 힘을 썼고, 온라인상에서 타 그룹을 비방한 적도 있었다. 먼저 자극적인 발언을 해놓고 더 가혹하게 돌아오는 반응들에 심장이 벌렁거렸었다. 그만큼 과열된 내부 경쟁이 2세대 덕질의 흔한 분위기였고, 덕질은 하루하루 피가 튀겼다. 물론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심리 상태가 반영된 판단이고 3세대나 4세대 아이돌이라고 해서 딱히 다른 것도 없지만, 철이 없으면서도 세상에 반항은 하고 싶어서 무작정 싸울 대상이 필요했던 시절에 덕질은 좋은 명분이었다.
온 세상이 지독하게 승리를 바란다. 모든 비참한 기분의 원인은 패배다. 덕질은 어느새 혈투로 전락했는데, 내가 덕질했던 그룹은 멤버 한 명이 탈퇴하며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미래가 보이지 않고 더 이상 기대할 수 있는 새로움도 없어 지쳤을 무렵, 오버워치라는 새로운 게임이 등장했다. 게임의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새로 생긴 e스포츠 리그에 과몰입하는 건 승부에 더 미쳐 있는 세계로 발을 들이미는 격이었다. 유난히 더 심한 비난과 욕설이 난무했음에도 게임이라는 장르가 주는 쾌감과 폭발력, 선수들의 투지가 그 모든 부정적인 영향들을 이겼다. 하지만 오로지 실력이 전부인 상황에서 패배는 더욱 쓰라리다. 안 그래도 불안정한 계약과 짧은 수명 때문에 매 경기의 승패뿐만 아니라 아주 잠깐의 판단과 실수가 선수의 커리어 전체를 좌우하는데, 출전할 때마다 쌓여가는 패배의 타격은 너무 컸다. 생각해 보면 난 누군가를 덕질할 때 그 사람을 좋아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미래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차트 위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아이돌 덕질을 넘어 냉혹한 프로게이머 덕질까지 경험하며 경쟁이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낙담시키는지 아주 잘 알았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미소를 짓고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도 헷갈렸다. 그러나 그렇게 혼란스러웠을 때에도 역시나 덕질이 답이었다. 어떻게 하면 몰입할 대상을 찾아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지 워낙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평화로운 것처럼 보이는 시기를 보냈다. 그러다 지난주 일요일에 있었던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결승전을 보면서 형체 없는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한 해보다도 짧은 단위로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뀌어 당장 내년도 기약하기 힘든 e스포츠 세계에서 데뷔 10주년, 그것도 7년 만의 우승은 지나치게 드라마틱하다. 언젠가 페이커가 했던 말처럼 그날의 경쟁은 내게 좋은 영향을 줬고 엄청난 영감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승리의 순간이 남긴 여운을 그토록 사랑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