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운 Jan 01. 2024

103분의 주마등과 클라이맥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후기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한 마디로 103분의 주마등이다.


음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지 않아 스크린 앞에 앉아 있는 내내 그 어떤 곡에도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난 그냥 사카모토 류이치의 마지막 콘서트에 말 그대로 내던져졌다. 초반에는 피아노에 이런 음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세심하고 지루한 연주가 이어졌다. 깊고 공허한 그의 언어에 익숙해지려면 그 단계를 꼭 거쳐야 했다. 어떤 아주 느린 곡에서는 약간의 속주도 힘든 몸 상태인가 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아직 죽음을 앞둔 음악가의 기술적인 부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낯선 음악에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마냥 얌전하지도 않고 또 지나치게 다혈질적이지도 않은 다양한 감상과 감성들이 시간을 가늠할 수 없게 흘러갔다. 그동안 피아노 앞의 그는 줄곧 오케스트라 없이 혼자였다. 정확하진 않지만 <Solitude>라는 곡에서 인생은 혼자고 죽음의 순간도 그렇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러면서 순장은 억지스럽다고 느꼈다. 태워 바쳐야 할 시신 위에 살아 있는 제물을 굳이 더 추가하는 건 영 부자연스럽지 않나? 결국 죽음 앞에서 우리는 동행도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클라이맥스는 죽음이다. 우리는 살아 있을 때 죽음만큼의 정점에 이르지 못한다. 설령 우리가 극한의 환희나 비애를 맛봤다고 해도 피아노의 공명이 점점 외부 소리에 묻혀 언제부턴가 들리지 않듯이 클라이맥스도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다. 어떤 죽음을 기억하고 떠올릴 때만 잠깐 반짝한다. 그러니 우리는 그 찰나를 제외한 생의 거의 모든 순간에 공허함을 느낀다.


이 영화를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이하 <코다>)와 함께 보면 더 보이는 게 많다. 피아노 줄에 작은 금속 장치를 섬세하게 달아서 피아노가 피아노 같지 않은 소리를 내도록 의도하는 장면이 있다. <코다>에서 사카모토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몰고 온 쓰나미 속에서 살아남은 피아노를 직접 보러 가고 건반을 두드려본다. 음의 변형이 일어나고 예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피아노에서 그가 깊은 감명을 받았던 건 영원에 대한 갈망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처럼 보인다. 당시 그는 암이 찾아와 점점 쇠약해지는 자기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소리를 연구하고 채집하러 재난 현장과 자연 속으로 거침없이 침투하는 실험가였고, 원자력 발전소의 가동을 막는 시위에서는 힘차고 확신 있는 하나의 목소리였다.


예술의 진가는 자신의 상황이 작품 속에 녹아들 때, 박자와 맞는 숨소리와 페달 밟는 소리, 주변 관람객들의 불편하지 않은 소음이 끼어들 때 탄생한다. 그리고 마침내 <Merry Christmas Mr. Lawrence>에서 내가 가슴이 아파 숨을 제대로 고르지도 못한 채 눈을 질끈 감았던 이유는 이 노래를 자주 들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절망이 소환되어 사카모토의 죽음과 교차했기 때문이다. 난 그때 이 영화가 인간에 관한 깊은 진실을 담은 작품(opus)이라고 인정했다.


막상 죽음은 두렵지 않다. 사실은 집행유예와 같은 노화가 더 두렵다. 난 그가 노화 없는 죽음을 실천했다고 본다. 물론 신체의 노화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젊은 날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그렇다고 단순히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계속 연습하고 다시 시도하면서 노화 없는 죽음이라는 말에서 모순을 제거했다. 실존하는 누군가의 마지막은 부활이나 환생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다. 그게 이 영화의 필연적인 결말이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아주 뻔해지고 고루해질 수 있다. 그는 위대한 음악가였습니다, 우리는 그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편안히 보내줍시다 같은 상투적인 애도만 쏟아질 수 있다. 하지만 난 그의 유작이 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에서 예상을 빗나가는 결말을 발견했다.


서로 좋아하지만 어른들과 동급생을 포함한 세상의 편견의 시선을 피해 둘만의 아지트에서 놀곤 했던 초등학생 요리와 미나토는 태풍과 산사태를 만나도 걱정과는 달리 수로를 통해 너무나도 멀쩡히 살아나온다. 이런 생존의 과정 또한 일종의 탈출 놀이라고 생각했는지 왠지 모르게 해맑아 보이는 요리는 무겁지 않은 목소리로 미나토에게 묻는다. “우리는 새로 태어난 걸까?” 그러자 미나토는 대답한다. “그런 일은 없어. 그대로야.”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와 <괴물>이 우리에게 감동과 위안을 주는 건 비극이 아니라 열린 결말이라는 점이다. 이야기는 쭉 달려가고 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음악을 만든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없지만, 우리는 그 음악을 여전히 듣고 있다. 이런 경험들을 살아 있는 동안 차곡차곡 쌓으면 언젠가는 우리의 죽음도 후대의 또 다른 누군가에게 클라이맥스, 혹은 작품(opus)이 되지 않을까?


Ars longa, vita brevis.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매거진의 이전글 몸의 원활한 가동을 위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