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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 Feb 26. 2024

모든 비현실적인 것들은 현실을...

소설 『밀레니엄 피플』과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난 허무주의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의미 중독자다. 하지만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깊이 생각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글을 썼더니 약간 고장이 났다. 그래서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까지 경미한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는데, 원인도 없이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소설 『밀레니엄 피플』과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봤다. 왜 굳이 이 두 작품이어야 했는지는 순전히 직관적인 선택 때문이어서 지금 결론을 내리기에는 조금 이르다. 계속해서 글을 더 써보자.


『밀레니엄 피플』은 sf 소설로, 흔히 ‘외우주’로 시선을 돌리는 기존 작품들과 달리 ‘내우주’의 이야기에 안착한다. 특히 이 책을 읽게 만드는 키워드 중 가장 강렬한 것은 ‘중산층 혁명’이다. 누구나 중산층이거나 중산층을 꿈꾼다면, 계급 계단에서 한 걸음 내려오고 싶지 않은 부유층을 제외한 이들은 관심을 가질 법하다. 어쨌든 나도 그러한 이유로 이 두꺼운 독서에 용감히 뛰어들었다. 일단 섣부르게 이 이야기에 대한 평을 남기자면, 산소에 너무 오랫동안 노출되어 녹이 슬어버린 칼을 건네받은 느낌이다. 본질은 칼이지만 날은 무뎌졌고, 예리한 찌르기보다 파상풍이 더 두렵다. 책이 출간되었던 2003년으로부터 21년이 흐른 지금 이 이야기는 우리 삶에 완벽히 들어맞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근미래를 다루는 sf의 매력이자 한계이다.


그래도 우리는 실제 현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상관없이 결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중간 계급보다 조금 위에 있는 부류가 (정확히 무엇에 관한 건지는 모르지만) 전복을 목적으로 혁명을 일으킬 때에는 자신의 위치가 가운데를 축으로 해서 반전될 결말까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 구조나 최상류층 등의 공격 대상을 정하지 않은 채 편안하게 문화를 향유하는 자신들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하는 중산층 혁명의 주역들은 그 결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 높은 곳으로 솟아올랐다. 아주 협소한 혁명이 바꾸어놓은 것은 더 이상 주차비를 내지 않는 것이었다. 역시 성찰로는 환경 파괴를 막을 수 없는가 보다.


한편 혁명은 정말 짜릿한 것이기도 하다. 내 손으로 견고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은 곧 쾌락이다. 또 단번에 내가 중요한 인물로 떠오르고 중요한 역사적 흐름 속에 포함되는 멋진 시나리오를 노동 계급만 느끼라는 법은 없지 않나 하는 데서 오는 욕심. 나도 그 부류가 아닐까? 2월 19일에 다이어리에 썼던 것처럼, 난 무언가에 진심으로 저항해본 적이 없다. 대의는 전혀 없고 그저 조금이라도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길 바랐다. 지금까지 내가 실행했던 저항들은 단 한 줌의 공감 능력도 키우지 못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밀레니엄 피플』은 무서운 소설이다. 중산층 혁명은 엄청 말이 되는 개념처럼 보이지만, 결국 무의미했다. 애초에 중산층이 내걸 수 있는 캐치프레이즈는 경찰이 애써 진압할 필요도 없을 만큼 위협적이지도 않고, 다주택자가 한 채의 부동산을 가지고 폭력성 실험 내지는 색다른 놀이를 한 셈이 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대체 무엇을 위해 생각과 행동을 전개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남는 것이 없다. 이 평행세계는 그 자체로 끝났으며 이어지는 다른 세계는 없다고 말하는 결말이 너무나 허무하다. 그 다른 세계에는 아직 내가 있는데. 독자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 같은 세계관이 난 영 불편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메시지는 작품까지도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허무주의는 소설의 주제로 삼을 때 가장 위험 부담이 크다. 만약 대중 취향에 역행하는 예술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혹할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내가 그랬다. 소외된 변방의 한 과학자가 혁신적인 신 에너지원을 발견한 뒤 인간 노동력 착취로 발전소를 운영하는 기업에 추적당하여 죽지 않기 위해 3명의 인물들과 합심해서 정부에 직접 기술을 전달하는 첩보 작전을 소설의 줄거리로 구상한 적이 있다. 또 해킹으로 밥벌이를 하던 전업 해커가 꼬리를 밟혀 무인 교도소에 감금되었는데, 인공지능 기관총의 삼엄한 경비를 주 무기인 해킹으로 물리치고 탈옥에 성공하지만 그 교도소는 육지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태평양 한가운데의 플라스틱 아일랜드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이야기도 떠올린 적이 있다. 결말까지 완벽히 설정해놨으나 도입부의 한 문장도 쓸 수 없었던 이유는 그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첫 번째 독자인 나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해서였고, 무한한 연상을 일으키지 못해 결과적으로는 실행력을 발굴하지 못해서였다.


이제는 허무주의에 대한 논의로 옮겨간다. 난 이 공허로부터 무엇을 길어 올려야 할까? 중산층으로서 자본주의를 대하는 방법을 탐구해야 할까? 그게 19년 만에 외국에서 열어보려는 새 삶에 당위성을 제공할까? 영 구미가 당기지 않지만 편식을 피하기 위해 소설을 조금씩 읽어보면서 작가보다 기자가 되고 싶어졌다. 겉을 핥는 인위적인 허구가 아니라, 직접 들어가야만 알 수 있는 진실들이 더 고프다. 왠지 그것들은 소설보다 덜 공허하다. 비좁은 머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비대한 세계를 감각과 경험이 대신 이해해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그렇지만 다른 현실로 출국하기 전까지 아직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다. 그동안 허무주의가 빚어낸 공허함을 해결하지 못한 나는 우울감에 휩싸여 나 자신과 세계를 비관할 것이다. 그러면 한 달 뒤 공항을 향하는 발걸음은 너무나도 무거울 것이고, 돈만 날린 나의 경험은 썩어갈 것이다. 그런 삶은 결국 떠나지 않은 것과 뭐가 다르지?


이 비애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되도록 앉은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단어들이 분열되고 문장들이 흩어져서 책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선택은 영화였다. 그리고 마치 넷플릭스를 틀었을 때 찜 목록에서도 한참을 방황하는 것처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도 그런 류의 영화였다. 언젠가 봐야지 하면서도 영원히 보지 않을 것 같았던 영화를 허무주의라는 연결고리 덕분에 마침내 보게 되었다.


영화는 총 2시간 19분의 러닝타임 중에서 2/3를 넘어갈 때까지도 허무주의가 무엇이고 그것에 어떻게 빠지는지를 멀티버스라는 흥미로운 세계관과 중국풍의 화려하고 익살스러운 액션을 곁들여 설명한다. 놀라운 상상력의 향연에 가볍게 입문한 관객은 점점 무거운 철학적 질문들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다 간혹 정말 형이상학적이 되려고 할 때마다 주인공 에블린(양자경)의 정신을 따라 현실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런 다중우주 간 완급조절이 일종의 각성제 역할을 하고, 우리는 마침내 깨닫는다. 허무주의는 나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걸. “고개만 돌리면 다 외면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최종 빌런의 자극적인 위로에 혀끝이 당기지만, 그런 탐닉은 다른 우주에 있는 내 목숨을 빌런에게 넘겨주고 말 것이다. 아, 그런 결말에는 이르지 말자. 눈이 달렸다고 해도 결국 돌멩이에 불과해 입 한 번 뻥끗할 수도, 손 한 번 뻗을 수도 없는 세계를 꿈꾸지는 말자.


에블린은 어떤 우주에서는 자신이 채찍질해 흑화한 빌런이고 또 다른 우주에서는 자신의 딸인 조이(스테파니 수)를 죽이는 데 실패한다. 아마도 이 모든 비현실적인 사건의 근간에는 에블린과 조이 사이의 잘못된 소통 방식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잘못 설정된 관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조이를 죽여버리면 의미가 없지 않은 “그 모든 거절과 그 모든 실망”을 만회할 수 없다는 걸 에블린은 서서히 깨닫는다. 그러면서 나도 나의 모녀 관계를 생각하며 노력하지 않고도 눈물을 흘렸다. 난 내가 돈과 실패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가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정체성과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직감 때문에 정체성을 낱낱이 해부하고 언어를 찾으려 애쓰고 있다. 그런데 그건 부모님과 무엇이든 함께하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지 못한 데서 오는 불안이자 부모님을 더 잘 이해해보려는 본능에 의한 것이다.


지금도 해외로 출국해 길게 체류할 계획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떠날 준비를 시작하고부터 엄마가 더 이상 나와 함께하지 못할 순간들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27년간 품어온 자식을 처음 타국으로 혼자 떠나보내는 부모의 감정은 전부 비슷할 테고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적인 반응이겠지만,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에게서 그 모습을 발견하니 감상이 확연히 달라진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상식에서도 벗어나고 예측하던 미래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 모든 비현실적인 것들은 현실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한 것들이다. 그 점은 판타지 소설과 영화를 가치 있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나는 판타지 소설과 영화만큼 현실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루어지지 않아 답답한 꿈과 아예 사라져버린 꿈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 둘을 마침내 구분할 수 있게 된 나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이해 가능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그건 ‘에브리씽 베이글’을 혼돈이 아닌 다양한 풍미의 결과물로 만드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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