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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 Mar 11. 2024

태평양 위 하늘에 나라를 세우자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가 피워낸 다짐


영화가 슬펐어도 글은 눈물을 닦고 써야 한다. 지금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지 며칠이 지난 시점이라 때마침 눈물이 말라 있는 상태다. 지금이 리뷰를 쓰기에 적기다.


영화는 12살의 첫사랑들이 이민이라는 이별을 겪고 12년 뒤에는 스카이프로, 또 그 다음 12년 뒤에는 뉴욕에서 직접 만나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단순한 플롯이 익숙한 감성을 재현하면서도 감독이 어렴풋이 남긴 메시지는 평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지만 사랑이 해결해줄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 아름답고도 아릿한 영화를 마음은 태평양에 있지만 몸은 어느 한쪽 대륙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자신 혹은 소중한 누군가가 한국을 떠나본 적이 있거나 어찌 할 바 모르겠는 상실감과 해방되지 못한 갑갑함을 경험해봤다면, 이 이야기가 거기서 발생한 공허함을 서사화하고 영상화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건 영화를 직접 봐야만 알 수 있다. 그 전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이 그저 망한 사랑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이들에게 이 이야기는 허구일 때 가장 빛난다. 그게 내가 ‘아릿하다’고 표현하는 이유다. 24년 만에 재회해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를 배웅한 뒤 다시 왔던 길을 따라가며 노라(그레타 리)는 눈물을 흘렸다. 사실 아릿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캐릭터는 많이 울었다. 나도 그 장면에서는 눈물길을 막을 수 없었지만, 무거운 마음과는 달리 눈에서는 아주 가벼운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노라는 과거의 꿈과 사랑을 원래 자리로 보내주었고, 어쩌면 잃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돌아온 집 현관에서는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대표하는 미국인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전부를 잃은 게 아니다.


이제 나는 전부가 아닌 절반만 잃은 상태에 공감하며 이 작은 반도에서 내가 가진 가능성에 관심을 쏟고 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수시로 언급되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연’이라는 한국적인 정서, 더 나아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피부보다는 키링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벗을 수 없는 껍질이 아닌 느슨한 연결고리, 개성처럼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상징, 탄성이 있고 유연한 거리감 같은 것 말이다. 안보다 밖과 더 많이 연결되는 시대에는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생존 방식인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지만 사랑이 해결해줄 수 없는 이야기를 다룬다. 만약 우주의 흐름을 완전히 거스르길 좋아한다면 과거의 꿈과 사랑을 위해 현재의 남편에게 뜬금없는 이별을 고한 뒤 어릴 적 첫사랑의 손을 잡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노라는 해성(유태오)에게 이번 생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서로가 서로에게 인연이니 다음 생에서는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결국 해결사의 역할은 상상이 대신할 것이다. 그러면 태평양 위 하늘에 나라를 세우자. 그런 방식으로도 어딘가에서는 무언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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