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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과나 Oct 07. 2024

중 3 아들과 푸닥거리 후 AS


슈와 한바탕 난리가 있고 나서 나에게는 충격이었던 게 있다. 슈가 '다른 사람들은 엄마처럼 빡빡하게 살지 않는다. 왜 그렇게 하루를 슬롯 채우듯 빡빡하게 살아야 하느냐'고 했던 말이다.


내가 하루하루를 슬롯 채우듯 사는 건 맞다. 근데 그건 나한테는 너무 당연해서 그걸 보고 다른 엄마들은 안 그러는데 '우리 엄마 왜 죠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신기한 거다.


다른 한편으로는 면죄부를 얻은 것도 같았다. 무슨 말이냐면 나는 분명히 열심히 사는 것 같고 그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라면 자연히 아이들도 나와 비슷하게 될 줄 알았거든. 그런데 내가 부지런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회사 일을 책임감 있게 하고 좋은 평가를 받는 것들을 보면서도 전혀 비슷하게 따라하지 않는 아이를 보면서 자괴감을 느꼈다.


내가 새벽 같이 도시락 싸서 지각할까봐 발 동동 구르면서 출근하는 사람이었으면 아이들이 알았을까? 엄마아빠가 애쓰며 살고 있다는 걸.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노력이라는 걸 해야된다는 걸. 


아침에 늦잠 자고 일어나서 10시까지만 책상에 앉으면 되는 재택근무를 하는 직장에 다니고 20년 근속을 한 덕에 연차가 한달 가까이 있어서 일을 빵꾸내지만 않으면 휴가를 얼마나 붙여쓰든 언제 쓰든 자유로우니까 엄마가 놀고 먹는 걸로 보이나? 대충 살아도 잘 사는 것 같아 보이나? 이런 게 가능한 직장에 다니려고 내가 노력한 세월은 안보이니까 없는 건 줄 아나?


열심히 사는데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실패한 건가. 낭패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는데 아이 눈에도 엄마가 빡빡하게(=열심히) 사는 게 보였다는 거니까. 내가 안 보여줘서 못 따라한 건 아니구나 내 잘못은 아니구나 안심했달까. 얄팍한 자기만족이지만. 다만 집안 분위기가 시대의 분위기를 압도하지 못했다는 낭패감도 같이 얻었다. 졌구나.


그래서 오늘은 내친 김에 아이들을 불러놓고 얘기했다. 충격요법이닷!


"얘들아 무서운 얘기 하나 해줄까?"


"네? 뭔데요?"


"니네들이 사회에 나가서 경쟁해야 될 아이들은~ 아마 엄마 같은 애들일 거야."


"헐, 너무 싫다."


"그리고 지금 이십대가 부모 보다 못 사는 첫 세대가 된다는 얘기 알고 있니?"


"네? 진짜요?"


"아, 너희들은 아직 사회에 나가보지 않아서 못 들어봤나 보구나. 지금 이십대들은 사회의 문을 열어젖히고 싶은데 좀처럼 열어젖힐 문고리가 손에 닿지 않는 경험을 해봐서 많이들 아는 얘긴데. 그런데 사회에 진출할 때 자빠지고 고꾸라지는 건 엄마 때도 그랬어. 정도의 문제인 거고. 그리고 엄마 주변에 후배들 보면 어쨌든 열심히 하면 어딘가 길은 찾더라.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럼 예전에는 부모보다는 자식들이 더 잘 살았어요?"


"그렇지. 그 세대가 뭘 잘했다기 보다는 세상의 파도가 점점 더 높은 곳으로 데려다 준 것에 가깝지. 엄마의 부모님 세대, 그러니까 너희에게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는 농경시대에서 산업화시대로 빠르게 바뀌는 시대를 사셨으니까. 새 옷을 입으려면 집 앞 밭에 대마를 심어서 그 섬유질을 실로 만들었다가 그 실타래로 베를 짜서 하루종일 밭일 하고 난 엄마가 새벽에 꾸벅꾸벅 졸면서 옷을 지어야 새 옷이 나오는 시대를 사신 분들이 지금은 공장에서 만든 옷을 돈만 주면 사입을 수 있는 시대에 사시는 거니까.


반대로 지금은 모든 것이 포화상태가 되었다고 해야하나. 세상이 굴러가게 만드는데 사람들의 힘이 점점 덜 들어가고 기계와 시스템을 돌리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수많은 인간을 먹여살리고 대부분의 인간은 잉여가 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인간을 가르치고 인간이 인간을 돌보는 일 정도만 살아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중이야. 그렇지만 이건 그냥 예상인 거고 실제로 너희가 사회에 나올 때 쯤에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예전과는 다른 세상에서 너희도 예전과는 다른 일을 하면서 살지 않을까? "

이런 얘기를 간식 먹으면서 잠깐 하고 각자의 일을 하러 흩어졌다.


이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 아직은 작심삼일의 영향권 내에 있어서 그런지 슈는 약속한 시간 내에 숙제를 제출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아이들이 챗GPT를 시켜서 보고서를 만드는 시대에, 한땀한땀 한자 쓰고, 영어 읽고 녹음하고, 매일의 문제집을 풀고 이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도 결국 근본은 자기 안에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부의 결과물로 쌓인 지식도 중요하지만 우리집 크고 귀여운 슈에게는 일단 매일 할 일을 챙겨하는 나 자신에 대한 자존감, 그 과정에서 조금씩 나아지는 자신의 면모를 확인하는 즐거움, 그걸 느껴보기를 간절히 바란다.


드론으로 폭격을 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쏘아 전쟁을 하는 시대라고 해도 결국 군인이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육탄전을 벌여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관건이다. ai가 통번역 일을 대체할 수 있다고 해도 검색만 잘 하면 내 집 안방에 앉아서 전세계를 다 둘러볼 수 있다고 해도, 네이버 파파고로 번역해서 찾아낸 키워드로 구글에서 꼭 맞는 정보를 찾으려고 하는 것과 내가 실제로 러시아어를 잘 해서 러시아인들이 쓰는 커뮤니티에서 찾아낼 수 있는 정보의 질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언제나 기본을 갖추어야 한다고.


그 기본을 갖춘 다음에 필살기를 만들어 가자고.


오늘도 일 끝나면 운동 슬롯 채우러 갈 생각에 들뜬 엄마가 힘차게 외칩니ㄷ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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