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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과나 Nov 13. 2024

아스팔트 단상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수고로움을 보며 엄마 노릇을 생각하다

주 3회 검도를 하고 주 2회 필라테스를 간다. 월수금 검도를 하고 검도를 한 다음 날 필라테스로 스트레칭을 해주는 것이 5월에 검도를 다시 시작한 후 내가 정한 루틴이다. 오늘은 그 루틴에 따라 아침에 필라테스를 하러 가는 날이었다. 

필라테스 스튜디오로 가려면 8차선 대로를 건너야 하는데 며칠 전만 해도 있었던 건널목이 싹 사라지고 새로 아스팔트가 깔려 있었다. 건널목 표시를 하기 위한 마킹만 띄엄띄엄 새로 깔린 아스팔트 위에 점점이 빛이 났다. 꽤 긴 길인데 언제 아스팔트를 새로 깔았나 싶어 깜짝 놀랐다. 조금 과장하자면 자고 일어났더니 천지개벽이 일어난 느낌이랄까.

어제 저녁에 검도를 하러 나갈 때 걸었던 길도 이 대로의 아래쪽 끝인데 도로를 통제하고 뭔가를 하는 낌새는 전혀 없었다. 그러니 결국 모두가 잠든 사이 공사를 했을 거라는 것을 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어제 운동이 끝나고 동아리 후배들의 연무식에 특별출연으로 검도의 본 시범을 보일 준비를 하느라 조금 더 남아서 연습을 했다. 씻고 나와 지하철을 타고 우리 동네에 내리니 이미 밤 11시가 넘어있었다.

너무 힘들지도 않게 너무 성에 안 차는 정도도 아니게 딱 기분 좋을 강도로 운동을 하고 딱 기분 좋은 피로함을 안고 돌아와 아이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남편과 화상통화를 하면서 하루를 잘 마무리하고 1시쯤 잠들었다. 6시 20분 알람에 맞춰 일어나 고딩 딸내미 아침으로 잡곡식빵을 오븐에 노릇하게 굽고 그 사이 해독주스를 갈고, 딸내미 취향에 맞춰 잘 구워진 빵에 버터만 발라 세팅을 했다. 딸이 먹는 동안 인덕션용 에스프레소 기계에 에스프레소를 추출해서 카페라떼를 보온 텀블러에 가득 만들어 식탁 위에 올려두는 것으로 고등학생 딸을 위한 아침 준비는 끝이 난다.

딸이 나가고 나면 아들내미를 깨울 차례다. 이 겨울이 지나면 고등학생이 될 슈녀석은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하는 게 걱정이라 6시 55분에 알람을 맞춰놓고 잔다. 어느 학교를 가든 누나보다 더 일찍 집에서 나서야 할텐데 학교가 코앞인 중학교에도 미인정 지각을 몇 번 했고, 그게 고등학교 진학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뺑뺑이로 인문계 고등학교를 갈 거면 중학교의 미인정 지각, 결석은 딱히 영향이 없지만 쟁쟁한 마이스터고나 쟁쟁한 특성화고를 가려면 성적과 출결이 어떤 일을 하는지 이제야 안 것이지. 

인간은 모두 들어서 머리로 아는 것과 진짜 아는 것이 다르지만 가만보면 슈는 특히나 들어서는 모르고 겪어봐야 아는 녀석인 것 같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서 맛을 봐야 하는 녀석. 그래도 어린 시절 작은 실패를 원없이 해봐서 지금은 조금씩 자기가 필요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동안은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열심히 하는 엄마가 아니었다. 어느 학원이 좋을지 철저히 공부해서 아이를 집어넣는 엄마도 아니었고, 조금이라도 더 재우고,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주겠다며 라이딩을 하는 엄마도 아니었고, 아이 지각을 안 시키겠다고 두드려 깨우는 엄마도 아니었고, 5첩반상을 정성껏 준비해서 먹이는 엄마도 아니었다. 니 인생은 니 인생, 내 인생은 내 인생, 나는 내 인생이 더 소중해. 너는 너 알아 살아 모드였다. 지각을 하면 선생님이 혼내시겠지. 혼이 나면 알아서 일어나겠지. 엄마가 깨워주면 지각이 엄마의 책임이 되잖아? 내가 왜 그런 손해보는 장사를? 이었달까.

그런데 이제 아이가 고2, 중3이 되고 보니 끝이 보이는 거다. 스무살이면 나가 살라고 했던 아이들의 시간이 2년 4년밖에 남지 않았다.(인서울 대학교에 간다면 졸업 때까지는 방세 안 받고 재워주기로 했다.ㅋㅋㅋ) 그렇다면 아이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지막 시기인 지금, 내 자아의 영역 중에 엄마 노릇 영역을 조금만 더 늘여보기로 했다.

그래봤자 남들 다 하고 있던 것들이다. 아침에 늦잠 안 자고 아이 일어나는 거 살피기, 아이 아침밥 뭐라도 챙겨주기, 해독주스 챙겨주기, 아이랑 학교 설명회 들으러 가기, 가고 싶은 대학 입시 전형 상세 정보 찾아보기 정도지만.

나른하고 노곤한 기분 좋은 피곤함을 안고 돌아와 꿀잠을 자고 일어난 사이 새로 깔린 아스팔트 도로를 보고, 새벽을 도와 8차선 도로의 아스팔트를 새로 까는 수고를 해주신 이름모를 분들을 생각하며 아이들 모르는 곳에서 엄마노릇을 조금 더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의식의 흐름 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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