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진단 받다
간장이는 나의 자부심 같은 거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천사 아기였다. 안아서 재우면 아이도 깊이 못 자고 엄마에게도 무리가 오니 스스로 잠들도록 하는 게 좋다는, 그 시절 대유행하던 육아서 <베이비 위스퍼>를 보고 안아재우던 아이를 모로 뉘여놓고 등을 토닥여 재웠다. 조금 보채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그냥 잠들어 버리는 아기였다. 그 덕분에 둘째가 생기기 전까지 내게 육아는 엄마가 의지를 가지고 실천하면 바라는 바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아마 나에게 아이가 간장이밖에 없었다면 나는 아주 오만한 태도로 다른 엄마들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간장이는 능숙하게 공을 하나씩 더해가며 저글링을 하듯 월령에 맞춰, 나이에 맞춰 그 나이에 요구되는 것들을 거뜬히 해냈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주산암산을 방과후 수업으로 오래 해서 식당에 가면 밥값 계산은 믿고 맡길 수 있는 아이. 수포자 엄마 아빠 밑에서 어떻게 이런 아이가 나왔나 싶게 수학 머리가 있는 아이.
학원에 보내지 않아도 해야할 일은 스스로 하고, 학원에 가고 싶다고 먼저 말을 하는 아이. 그렇게 처음 간 사교육 학원이 초6 때 동네 수학 학원이었다. 중학교 내내 주요과목에서 A를 받아왔고 열품타 같은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앱을 설치해서 다이어리에 할 일을 적어가며 공부하는 아이였다. 물론 중학교에서 A는 고등학교에 가면 1등급부터 4등급까지 벌어질 수 있는 성취도임을 알지만 우리집에는 주요과목에서 A를 받아보지 못한 아이도 있기 때문에 이는 단연 아이의 성실도를 말해주는 지표가 된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내신경쟁이 치열한 학교를 피해 일반고등학교를 선택했다. 하지만 일반고에서도 원하는 대학교에 진학하는데 충분한 내신을 받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성적을 받아오면 조금씩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 과정이 힘들었던 것도 같다.
언젠가부터 아이는 2D 애니메이션이니 아이돌이니 밴드니 대상을 바꿔가며 덕질을 했다. 학년이 점점 올라가는데 폰을 잡고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더니 고2에서 고3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겨울방학에 멈추어 버렸다.
집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어 가장 따뜻하지만 가장 어두운 제 방에 들어앉아 하루종일 누워있었다. 눈 앞 10센치 거리에 핸드폰은 항상 고정되어 있었다. 씻으라고 해도 씻지 않고 학교에 자습을 하러 가지도 않았으며 자다가 학원 시간을 넘기기도 일쑤였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저러나 싶어 방에 들어가 혼을 내면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방학이 오기 전 10월 경, 회사에서 직원과 그 가족들에게 연간 8회의 상담을 제공한다는 안내가 왔길래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심리상담을 받아보겠느냐고. 받아보겠다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상담을 하기 전 설문지를 채워야 했다. 상담하고 싶은 안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이는 네 글자를 또박또박 썼다. ‘자기혐오’.
자기혐오라.
가끔 방에서 나와 집안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 “엄마 나는 확신이 있어. 나는 무조건 어떻게든 잘 될거라는 확신.”이라는 말을 던져놓고는 들어가기도 하고 “내가 최고야.”라고 뜬금없는 자뻑 멘트를 날리기도 하는 아이라서 그 단어에 흠짓 놀랐다.
10회가 넘는 상담을 하면서 아이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길 바랐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학교에 가야하는 날인데 아이가 학교를 못 가겠다고 한다. 병원에 가보자고. 나도 급히 휴가를 내고 병원으로 향했다. 아이가 알아온 병원이었다. 예약제가 아니라 무조건 가서 기다려야 하는 곳이었다. 평일 오전이니 괜찮으려니 했지만 꽤나 오래 기다렸다. 아이는 접수할 때 야무지게 3번 진료실의 선생님을 뵈러 왔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아이가 우울증이 맞는 것 같다며 약을 처방해주었다. 이 약은 한 번 시작하면 짧아도 6개월은 먹어야 된다고도 했다. 중간에 나아지는 것 같다고 그만 먹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아이는 우울증 환자 확인을 받고 하루 두 번 약을 먹는 것, 학교를 무사히 다녀오는 것. 그것이 유일한 목표가 되는 나날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