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이다.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날이라 잘 보내지 않으면 6.25전쟁일이 되어버린다. 점심을 먹다가 전쟁을 했고 저녁을 먹기 전에 화해했다.
전쟁 발발 후 나는 아들 방에서 회사 일을 하고 남편은 안방에 누워 유튜브를 보며 본인이 입은 내상을 달랬다. 그가 화났을 때는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다. 시간이 지나 화가 가라앉은 것 같을 때 가서 슬쩍 건드려보면 답이 나온다.
아, 오늘 하루는 더 묵혀야겠구나, 혹은 아, 다 풀렸구나.
이번에는 후자였다. 회사일이 끝나고 남편에게 가서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니 트레이더스에 가서 치즈케익도 하나 사고, 수박도 한 덩이 사고, 한우등심도 한 덩이 사 오자고 살살 달랬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남편에게 말했다. 아이를 상대하는 일은 나에게 맡기라고. 아이를 잘 키워보려고 육아책 수십권을 읽은 내가 보기에 당신의 발언은 종종 선을 넘는다고. 여자가 말하면 콧방귀도 안 뀌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말하지 않고 당신을 내세우듯, 보복 운전을 하는 남성 운전자를 다루는 방법은 당신이 잘 알듯, 십대 청소년을 다루는 방법은 내가 잘 안다고.
아이들 앞에서 당신 말을 끊는다고 해서 그게 집안에서 당신의 권위를 내가 뭉개버리는 게 아니라고. 그냥 내가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신호를 주면 당신은 그 말을 들으라고. 내가 평소에 당신 보좌관, 비서처럼 기능하고 있지 않냐고. 원하는 걸 말하면 주문해주고, 여행을 간다고 하면 후보를 몇 개 찾아서 당신에게 컨펌받지 않냐고. 이 집의 가장은 당신이라고. 그러니 기싸움이나 권력다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아이들 앞에서 내가 주는 신호를 받아들이라고. 그게 당신의 미숙한 부분이니까.
아이들이 우리 품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 기간 동안 우리는 그저 응원하는 사람이 되자고. 지적하고 그렇게 하면 잘 안 될 거라고 경고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고. 그 말을 하지 않기가 너무 어렵지만 그걸 해내자고. 그리고 결국 당신 옆에 있을 사람은 나니까 우리 둘이 잘 지내면 된다고. 당신은 중년 남자 중에서는 드물게 그림 보는 걸 좋아하고 클래식 음악회도 좋아하고 심지어 우리는 검도도 같이 (검도장에서 만남 주의) 하니까 앞으로 우리 둘이 잘 지낼 수 있는 꺼리가 얼마나 많냐고. 남편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트레이더스에서 사온 치즈 케익에 싱크대 서랍에서 찾은 5개의 초를 꽂고 (결혼 20주년이니까 초 하나에 4년씩라고 누가 물어 본 사람?) '생일 축하합니다' 멜로디에 맞춰 '결혼 축하합니다' 노래를 같이 부르고 부부가 같이 촛불을 불어 껐다.
결혼 기념일이니 한 마디 하라고 주먹 마이크를 내미니 '아빠가 엄마 만나서 덕분에 잘 산다.'라고 짧게 말했다.
그렇게 625 전쟁은 다시 우리의 결혼기념일이 되었다.
나도 당신을 만난 덕분에 더 많은 것을 배웠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우리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어. 서로가 서로의 덕분이어서 천생연분인가?
멋쩍어서 던져보는 아무말 대잔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