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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 한 달 앞둔 고3딸과 이야기꽃

by 칼과나

간장이는 고3이다. 당장 추석 연휴가 끝나고 나면 주말마다 이 대학 저 대학에 실기시험을 치러 다녀야 한다. 자기의 미래가 어떤 모양일지 너무나 궁금하면서도 두려운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어떨 때는 난 무조건 잘 될 거라고 하다가도 또 어떨 때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거니는 것 같은 상태다.



추석 연휴 초입에 시댁에 왔다. 책을 읽던 아이가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두통이 자주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 약 챙길 생각은 못했고 시댁에는 소화제밖에 없었다. 물을 마시면 좀 나아지기도 한대 하며 물을 주고는 누웠는데 점점 통증이 심해진다는 간장이.



그때가 되어서야 편의점에서 상비약을 판매하고 있다는 게 떠올랐다. 약을 사다 두 알을 건네고 아이 옆에 누웠다.



간장이: 두통이 오면 삶에 대한 기대는 저만치 멀어지고 머리 앞쪽과 뒤가 조여오면서 뇌를 쥐어짜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오면서 일상이 발밑으로 꺼져내리고 밟고 있는 것이라곤 발 밑에 작은 조약돌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아져요. 앞날이 어찌될까 막막해지면서 한없이 외롭고요.



아이의 불안과 고3이라는 상황과 두통이 아이에게 화학작용을 일으켜 미래에 있을지 없을지 모를 고통을 미리 꺼내 고통받고 있는 게 보였다.



간장아. 엄마는 숫자에 강하거든. 수포자라고 해놓고 그게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엄마는 고통이 숫자와 함께 오는 경우가 많았어.



필라테스 가면 모든 동작을 숫자로 세잖아. 동작을 반복시키면서 세고 힘든 자세를 시켜놓고 버티라면서도 세고. 등산을 갈 때도 한 걸음 한 걸음이 숫자를 쌓아가는 일이지.



그럴 때 엄마는 목표치를 생각하며 아득해하지 않아. 아니 안 그러려고 노력해. 지금 하는 한 번에만 집중해. 결국 지나가고 결국 끝이 나는 걸 알거든.



그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됐냐면 엄마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검도를 했잖아. 엄마가 운동을 좀 빨리 익히는 편이라고는 해도 남들보다 월등하게 파워가 좋거나 체력이 넘사거나 그런 건 아니었거든.



근데 검도는 시작부터 계속 숫자를 세. 3동작 머리치기, 좌우면, 손목, 허리 그 네 가지를 20번먼 치면 80번이지. 게다가 2동작 1동작으로도 각각 그만큼을 해. 그러고 나면 빠른머리라는 걸 쳐. 200번 300번 친단 말이야. 특히 빠른머리는 힘들어. 발은 앞뒤로 뛰면서 칼로는 머리를 치는 건데 그걸 몇 백번씩 치다보니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200번 언제 다 치나, 500번 언제 다 치나 이런 생각하면서 치면 더 힘들다? 지금 한 번 치는 것에만 집중하면 어느 새 10번을 치고 그 열 번이 열 번 모이면 100번이고 그 100번이 5번 모이면 끝이 난다. 그러니까 난 이거 한 번만 잘 치면 된다 고 생각한 거지.



여기서 중요한 건 힘들 때 그만두지 않는 거야. 너무 힘든데 아직 목표량은 다 못 채웠잖아. 그럴 때 그만 두면 다시 칼을 휘두르면서 중간에 시작하기가 더 힘들겠더라고.(느리게 치더라도 중간에 그만둬 본 적은 없어.) 그래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계속 하는 거야. 그랬더니 어느 새 끝이 나더라고. 그러면 나는 그걸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한 사람이 되더라.



그 후로는 숫자로 이루어진 힘든 일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사라졌어. 지금 한 번 지금 하루만 하면 언젠가는 끝이 나니까. 길게 얘기했는데 결국 힘들어도 지금 한 번만 생각하라는 거야. 미래의 거대한 뭔가를 미리 끌어오지 말고. 넌 그냥 지금 두통이 온 거고 진통제를 먹었으니 니가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고통은 멀리 밀려날 거야.



이건 필라테스하면서 배운 건데 배 근육이 찢어질 것 같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을 때 거친 숨을 헉헉 몰아쉬는 게 아니라 숨을 길게 내뱉으면 호흡이 곧 가라앉더라. 그래서 엄마는 요새 검도하다가 너무 힘들때도 호흡을 길게 내뱉으면서 숨을 골라. 그렇게 하면 거친 호흡이 빨리 정돈되고 상대에게 내가 힘들다는 티를 덜 낼 수 있거든.



엄마는 두통이나 복통을 경험한 적이 별로 없는 건강체라 간장이에게 이런 말을 하기 미안해. 그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면서 섣불리 말하는 걸테니까.


그렇지만 오늘은 두 가지를 기억해.

1. 고통이든 통증이든 지금 것만 상대한다. 미래를 끌어오지 않는다.

2. 지금 온 힘듦은 호흡과 함께 멀리 보낸다. 시간은 걸리지만 내쉬는 숨과 함께 사라질 것을 믿는다.



간장이: 아 두통이 오니까 또 거기에 빠져서 온갖 고통을 스스로 불러들였네요. 엄마가 없었으면 어쩔뻔 했어.




두통이 판을 깔아준 이야기꽃의 시간에 간장이는 발 딛은 땅이 허방으로 무너져 내리고 발 밑에는 작고 위태로운 조약돌 만한 것밖에 디디고 설 곳이 없는데, 그래서 믿을 것은 나자신밖에 없는데 나는 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다른 사람에게 맞춰주지 못해서 안달인지 그런 자신이 싫다고도 했다.



언젠가 간장이는 나와 대화를 하다가 '엄마는 왜 한 번을 내 말에 그냥 맞장구를 쳐주지 않아요?'라고 원망하는 말을 했었다. 그때 나는 몹시 곤란했다. 간장이가 생각하는 자신과 내가 생각하는 간장이 사이에 간극이 있는데 내가 동의하지 않는 말에 맞장구를 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간장이에게 반대의견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간장아, 너에게 분명히 그런 측면이 있을거야. 다른 사람의 기분을 살피고, 어떻게든 그들에게 맞춰 주려고 애쓰고, 누군가를 무작정 좋아하는데 정작 그만큼 돌아오는 애정이 없다고 느껴서 낭패스런 측면이. 하지만 엄마가 느끼기에 너에게는 분명히 결론이 나 있는 것들도 많아서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흔들리지 않아. 남들의 말을 절대 듣지 않는 고집 센 면도 있어.



예를 들면 너는 신소재공학쪽으로 고등학교 3학년 1학기까지 맞춰 놓은 학생부를 다 버리고 문창과로 방향을 틀었지. 그러고 나서는 무리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한치의 두려움도 없이 확신에 차서 이 길을 걷고 있어. 엄마 고등학생 시절을 기준으로 지금 너의 행보를 보면 너는 무지하게 용감하고 과감해. 그러니까 너는 너에 대한 자아상을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어."



간장이: 그건 그래요. 내가 4월부터 진로 틀었다고 하면 친구들이 대단하다고 하면서 놀라더라고요.



"그래, 너는 너한테 중요한 영역에서는 남이 뭐라고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개썅마이웨이가 있는 아이야. 지금 너에게 제일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게 아마 실기시험과 대입일텐데 시험 칠 때도 그 마음을 잊지 마. 요즘 실기시험 기출문제를 가지고 쓴 글이 몇 번 연속으로 빠꾸를 먹어서 아마 불안한 마음이 올라올 거야. 이래 가지고 대학에 붙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 말이야.



그런데 어차피 '이렇게 쓰면 뽑아주실까? 저렇게 썼어야 하나?' 벌벌 떨면서 쓴다고 좋은 글이 나오는 게 아니야. 자고로 예체능을 하는 인간들은 '내가 낸데!' 마인드로 해야 돼. '어쩌라고, 난 지금 이 글밖에 안 떠오르는데!' 하면서 그걸 붙잡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써야지. 그리고 너랑 같이 시험장에 들어온 애들이라고 프로 작가들이 아니야. 너처럼 글 써서 대학 가고 싶은 중생들이지.



간장이: 맞아. 나 진짜 그러네? 내가 맞다 싶을 때는 남이 뭐라고 해도 안 듣네?



"이제는 너가 남 눈치 보면서 맞추려고 전전긍긍하기만 하는 사람이라는 너의 자아상에 대한 엄마의 반박 납득?"



간장이: 응, 납득.



"엄마는 한국에서 아이 키우는 사람들이 아이가 공부 말고 다른 걸 한다는 것에 대해서 좀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어차피 좋은 대학 갈 수 있는 사람 수는 전체의 4~5 퍼센트, 많이 잡아도 10 퍼센트밖에 더 돼? 그래 좋은 대학 갈 수 있는 그 4~5%에 내 아이가 들었으면 좋겠는 마음은 인정. 근데 그럴 수가 없잖아? 그런 상황에서 나머지 사람들이 그걸 부끄러워하고 쉬쉬하고 그럴 필요가 뭐가 있어? 외국에서 아이 키우는 엄마 친구들은 항상 자기 아이들이 한국에서 자라는 아이들에 비하면 너무 행복하게 지낸다고 약간은 자조적으로 얘기하곤 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아이가 한국 같은 경쟁적인 분위기에서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어.



근데 엄마가 보기엔 한국에서 나고 자란 니네들도 충분히 재미있게 학창시절을 보내는 것 같거든. 너네들은 힘들게 생활한다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고등학생 때는 오로지 공부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4050 엄마의 눈으로 보기엔 말이야. 이건 엄마나 아빠가 너희를 그렇게 이끈 게 아니라 또래들과 함께 자라는 너희들의 고유한 특징인 것 같거든. 그러니까 한국 고딩들도 재미있게 살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라는 얘기를 사람들이 당당하게 많이들 했으면 좋겠어. 우리 애만 별종 같이 그러는 게 부모로서 부끄러워 죽겠는데 애를 이길 수가 없어서 그냥 쉬쉬한다 이러지 말고 말이야.



너만 해도 고3 때 동네 청소년 센터 같은 데서 가는 1박 2일 캠프, 2박 3일 캠프 가서 잘 놀다왔고, 고1, 2 때는 말 해 뭐하니. 슈도 고등학교 중간고사 치는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고 헬스장 가서 운동하고 시험 치러 가잖아. 뭔가 찌들려서 하고 싶은 걸 못하는 게 1도 없는 것 같거든. 재미지게 지내면서 입시공부도 잘 한다,가 아니야. 재미지게 학창시절 보내면서 어떻게 살지는 계속 고민한다,지.



같은 맥락으로 너처럼 한 전공을 향해서 전력으로 달려오다가 어느 순간 다른 방향으로 튼 사람의 이야기도 많이 들려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너의 행보가 누군가에게 용기를 내게 하는 기폭제가 되어 주는 선례가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간장이: 그러네? 그렇게는 생각 못 해봤는데 내 행보가 누군가에게 어두운 길에서 만난 작은 불빛이 된다는 건 멋진 거 같아요.



"아까 내 인생이 내 앞날이 어떨지 전혀 안 보여서 불안하다고 했지? 니가 보기에 이제 정년까지 10년 정도밖에 안 남은 엄마의 인생은 앞날이 다 보이는 것 같아? 엄마도 내 앞날이 어떨지 궁금해. 엄마도 여전히 나는 커서 뭐가 될까 항상 궁금해 하면서 살고 있어.



요즘은 산다는 게 오목을 두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5개의 돌을 연속해서 놓아야 되는 게 룰이잖아 오목은? 근데 상대편은 항상 내가 5개를 일렬로 연결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지. 그렇게 막혀 가면서도 내 것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곳에 돌을 하나씩 놓다보면 어느샌가 열린 네 개가 연결되는 순간이 오잖아. 그때는 상대가 부랴부랴 한 쪽을 막아 봐도 5개가 연결되는 걸 못 막아.



스티브 잡스가 connecting the dots라고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 될텐데 그래서 엄마는 요즘 사는 게 재미있어. 내가 좋아하는 것들, 계속하는 게 힘들지 않은 것들을 계속 하다보면, 걔네들이 연결될 순간이 오지 않을까? 라고 기대하면서 살게 되거든.



어디서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구름에 비 들었을지 모른다,라는 말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래서 지금 간장이가 느끼는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불안은 방향을 조금 바꿔 생각하면 내가 좋아하고 재미있는 일들을 계속하다보면 내 인생 어떻게 재미있게 살게될지 무척 기대가 된다는 얘기도 되는 거 아닐까?



엄마는 책 읽고 글 쓰고 검도를 열심히 하면서 이 세 가지를 하는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으쌰으쌰하면서 살다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어.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내가 이루고 싶은 일을 이루었다고 해서 나한테 꼭 좋은 게 아니고, 내가 원하는 걸 얻지 못했다고 해서 나한테 꼭 나쁜 것도 아니라는 윤도영 선생님 얘기도 기억했으면 좋겠어.


1. 내가 좋아 하고 계속하기 어렵지 않은 일들 몇 가지를 계속하면서 살다보면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

2. 내가 계획한 일이 잘 안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게 또 다른 시작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 회복탄력성(그걸 윤도영 선생은 인생은 기세다!라고 말해).


이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인생의 공격과 방어를 하면서 살다보면 뭔 일이 일어나도 일어나지 않을까?



딸아, 개썅마이웨이로 가자."



간장이: 아, 뭔지 알 것 같아요. 엄마랑 이렇게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내가 어떤 아이인지도 좀 보이고요.



아이는 이 날 나와의 대화를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표현했다. 어두운 방안에 나란히 천장을 보고 누워 나눈 대화들이 입에서 꽃으로 피어 우리가 누운 공간을 가득 채운 것 같은 장면으로 기억 속에 남았다.



"찰칵."



이 순간을 박제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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