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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롱 Mar 19. 2021

세상에 있는 모든 진상에 대하여.

제가 고객센터에서 일하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서비스 운영 관리. 그런데 이제 소량의 콜 업무를 동반한.






  한참 취직이 되지 않던 이십 대 후반. 스펙도 없고, 경력도 없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답의 개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는 걸 뼈저리게 깨우친 이후라 아등바등 구직 사이트를 뒤지던 내게 한 줄기 빛과 같이 내려온 문장 몇 마디.



신입 지원 가능. 무스펙자 환영. 소량의 콜 업무 있으나, 업무 강도 매우 낮음. 



뭐 별다른 수가 있겠는가. 나는 흔히 말하는 전화 공포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바들바들 떨며 이력서 제출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적어 놓은 '소량' 이란 단어에 온갖 희망을 걸면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서른이 된 지금도 이 자리에 앉아 무미건조하게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소량'과 내가 말하는 '소량'은 전반적으로 의미가 달랐고, 간장 종지에 담긴 물의 양만큼 '소량'을 원했던 나에게 국그릇으로 '소량'을 내밀며, 그래도 우리 회사는 진상 고객 없어. 콜 수도 많지 않고. 안 그래?라고 말하는 상사의 다정함을 (다정함인지 비꼼인지) 견디며 꾸역꾸역 스트레스를 퍼마시고 있는 중이다.



물론, 고객센터에 전화를 건다고 해서 모두가 진상은 아니다.


물건을 사용하면서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우리 회사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나 건의하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도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망적 이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보세요, 한 마디와 함께 나에 대한 '무시'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내가 안녕하세요, (어디 어디 회사입니다.라는 멘트는 단칼에 잘려나간다.) 한 마디를 하자마자 갓 횟집 도마 위에 오른 생선 대가리 치 듯 말 허리를 툭 자르며 내가 어떤 걸 주문했는데, 왜 배송이 안 되지? (이 부분에서 반말은 혼자 하는 혼잣말인지, 나한테 하는 반말인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또 대부분 나에게 하는 반말이다.) 물어보는 거다.


그래 뭐, 처음 만나는 누군가에 이게 예의를 갖춘 건지 아닌 건지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로 물건의 배송 여부가 궁금할 수 있지. 애써 마음을 달래며 고객님 혹시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시나요? 물어보면 010-0000-0000. 이게 끝이다. 끝에 010-0000-0000 이요, 라던가. 입니다. 라던가. 이거예요. 라던가! 붙일 수 있는 말은 여러 가지 아니던가. (그러라고 세종대왕 님이 나랏말싸미듕궉에 달아 한글을 만든 게 아니냐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남의 돈 벌기가 쉬운 것도 아니고.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확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한 지는 나도 모르겠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라고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한숨이 터져 나온다.


네, 라는 간단명료한 대답이 한숨으로 퉁 쳐진 거다. 이런저런 쓸데없는 말 빼고 빨리 정보나 달라는 식이다. 사실 나 또 한 서비스 안내 멘트 싹 다 빼먹고 번호는? 잠시만~ 하는 게 빠르긴 더 빠를 거다. 그렇지만 예의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 시간 동안 고객은 뭔가를 쩝쩝 거리며 먹을 때도 있고 (제일 전화받기 싫은 경우다. 화장실에서 큰일 보며 전화하지 않기. 입에 뭔가를 가득 넣은 채 말하지 않기. 이게 그렇게도 어려운가?) 내 귀에 들리도록 다른 사람과 정보 탐색이 느리다며 험담을 하기도 하고, 여보세요? 안 들려요? 하면서 기다려 달라는 내 말을 개무시할 때도 있다.


더 환장하는 건 이 모든 게 한 콜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거다.


아니 거의가 그렇다. 말을 잘라먹는 고객은 반말과 단답이 기본이고, 고객센터와 고객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전화 예절도 지키지 않는다. 





  백 마디 칭찬보다 한 마디 비난이 더 가슴에 콕! 박히는 게 인간이다. 나도 인간이고, 그전 통화에서 좋은 하루 보내세요~ 수고하세요~ 고생하시네요~ 아무리 좋은 말을 들어도 이런 콜 하나에 모든 게 백지화가 된다.


그럼 다른 사람 돈 벌기가 쉬운 줄 알았어? 누구나 다 그렇게 힘들이며 돈 벌고 살아!라는 말은 더 이상 내게 위로도, 채찍질도 되지 않는다. 매일 매시간마다 누군가의 무시를 당하며 일하는 삶. 성취감이 뭔가? 고객의 물품이 어느 지역에 있는지 찾아냈을 때? 문의를 한 번에 이해했을 때? 그건 그냥 반복적으로 나를 향해 날아오는 폭력에 지쳐, 익숙한 답변을 찾아낸 것뿐이다.



3년도 지난 쿠폰을 쓸 수 있게 해 달라며 소보원에 고소하겠다는 사람, 입금 내역 확인 좀 해달라고 했다고 이게 어디서 나를 귀찮게 굴어? 너네 인터넷에서 조리돌림 한 번 당하게 해 줘? 라며 어깃장을 놓던 사람, 너 같은 게, 너 따위가 라며 어떻게든 나를 꿇어 앉히려던 사람, 안내사항에 적힌 문구도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죽고 싶냐고 협박하던 사람 (끝까지 안내 문구 안 보인다고 화내다가, 찾아서 체크해 줄 테니 화면 캡처해 보내라는 내 말에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 됐으니까 빨리빨리 좀 처리하라고 내 말 이해 안 되냐고 무시하던 사람. (고객님이 정보를 말해주지 않는데 제가 어떻게 검색을 해요...)





나는 요즘 발화점이 매우 낮아졌다.

가만히 있다가도 화가 나고 신경질을 부린다. 그러면서도 전화벨이 울리면 안녕하세요~ 밝게 인사를 건넨다. 그래, 스펙도 없는 게. 능력도 없는 게. 그냥 이거라도 참고 살아야지. 내가 좀 미치겠어도, 죽겠어도 그냥 다 참고 살아야지. 


타인을 향한 밝음 뒤 그림자는 결국 또 나 자신을 혐오하게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진상.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나를 점점 무너트리는 그 사람들. 내가 그 직전에 어떤 수모를 당했더라도 어떻게든 밝게 인사를 건네야 하는 사람들. 





  나는 지금까지 속으로 꾹꾹 억눌렀던 진상들의 이야기와 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렇게라도 해야 낮아진 나의 발화점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단단하게 다져져 이제는 누군가에게 꺼내놓기도 어려운 이 감정들을 여기, 이곳에 쏟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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