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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롱 Mar 22. 2021

까칠하게 대답해서 죄송합니다.

친절하게 대답해드리고 싶은데, 목구멍에서 자꾸 고슴도치가 기어 나와요.



한 날은 이런 문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회사가 진행하는 이벤트에 참여하고 싶은데, 어떻게 참여 시 유의사항에 대한 안내가 하나도 없을 수 있냐는 거다. 물론 우리는 이벤트 페이지 앞 머리, 중간, 끝 부분, 그리고 참여 버튼 바로 위에 구구 절절 이 이벤트의 기원과 역사, 우리의 얼과 정신을 설명해 두었다.


고객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말을 비꼬았다. 아니 어찌 됐든 고객인 내가 유의사항이 안 보이고 불편하다는데, 뭔가 조치를 취해야 맞는 거 아니에요?


혹시 한국어 이해가 어려우신가요? 어려우시다면 지금부터 제가 뜻풀이를 시작해 드리겠습니다.라고 속에서 100번 되뇌었다. 그러나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말은 죄송합니다,였다.


내 대답에도 고객은 한참 동안 고객이 불편하다면 바로바로 수정을 해야 하고, 그게 바로 한국의 문화이고 (저는 30년 동안 아메리카에서 자라왔나요?) 손님이 왕인 이유다 라고 명강의를 펼쳤다. 나는 열혈 수강생이 된 것처럼 네, 네, 그럼요. 이후에는 말씀하신 대로 꼭 고쳐보도록 노력할게요. 감사합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고객은 진작 그럴 것이지, 쯧! 소리를 내며 끝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참이나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식의 말싸움을 끝내고 이제 좀 쉬어 보려는데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달디 단 초콜릿이라도 하나 까먹으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짧게 심호흡을 하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안녕하세요. 누가 봐도 시무룩한 내 음성에 고객은 아이고, 고생이 많네요. 뭐 하나 여쭤보려고 전화드렸는데요. 라며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순간, 내 입에서 고슴도치 한 마리가 툭 튀어나왔다. 그래서 어떤 일로 전화를 주신 건가요?

 

어떤 일로 전화를 주신 건가요?!





| 무기는 없어. 너에겐 방패만 주어졌을 뿐이지.





순간적으로 내뱉은 가시 돋친 말에 나 스스로도 흠칫 놀랐다. 아무리 체계 없는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다지만, 고객센터의 기본 소양은 첫 째도 친절, 둘 째도 친절, 셋 째도 친절이었다. 드디어 고삐가 풀린 건가? 스트레스로 인한 폭주 전조 증상인가? 그러나 나는 곧바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답변드리겠습니다. 죄송하지만 문의 내용이 어떻게 되시나요?"


무려 두 번이나 사죄드리며 날아올 비난을 기다렸다. 보통 이 경우 고객도 같이 가시 돋친 말투로 변한다거나, 반말을 시작한다거나, 전화를 끊지 않고 불만을 늘려 늘려 말하게 된다. 다 내가 자초한 일이었으니, 이 친절한 고객이 어떻게 나를 찔러도 참아내자. 퇴근 후 날 반겨줄 우리 고양이 얼굴을 떠올리자.


"아 다른 게 아니고~ 내가 나이가 들어서 인 지 로그인하고 사이트 이용하는 게 좀 어렵더라고요~ 선생님이 방법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아, 다짐한 건 취소.

나는 퇴근 후 날 반겨줄 고양이를 떠올리며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제가 가진 건 창을 막을 방패 밖에 없는데,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막아낼 재간이 없다구요.





| 제가 고슴도치의 주인은 아닙니다만...





친절한 고객과의 전화가 종료되고(끊기 전까지 죄송합니다 고객님, 혹시 더 궁금하신 점은 없으신가요? 불편사항은 다 해결되셨을까요? 와다다 쏟아내었다.), 후다닥 화장실로 자리를 피했다. 울지 않아. 절대 울지 않아. 이상하게 회사에서 울면 이 빌어먹을 회사 놈들에게 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꾹꾹 감정을 억눌렀다. 목구멍만 한 유리구슬이 천천히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예의 없이 뱉어낸 말에 찔러 아파했으면서, 내게 호의를 베푸는 이에게 똑같이 가시 가득한 말을 내뱉었다니. 만약 그 친절한 고객이 전화를 받자마자 욕설을 내뱉으며 나를 다그쳤다면? 말 끝마다 이해가 안 가요? 네? 나를 비꼬았다면. 내가 그럴 수 있었을까?


아주 못된 짓을 한 거다. 강약약강. 그 비겁한 모습을 내가 재현해 내고 있다니.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누가 나에게 고슴도치를 던졌다 한들, 그걸 다시 누군가에게 함부로 던질 수는 없다. 형체 없는 상처는 쉽게 전이되기 마련이다. 나는 그래서는 안 됐다.


내가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고슴도치의 주인이 아니었어도, 그건 내가 잘 방생해 줄 일이었지. 그 고객한테 던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지금은 사라진 회사 근처 꽃 집에서 찍은 수국. 수국의 꽃말 중 하나는 진심이다.)





| 순도 100%의 네 잘못은 아니란다.





친구는 횡설수설 이어지는 내 말을 듣다가 말했다. 전적으로 모든 게 네 책임은 아니라고. 너는 지쳐 있었고. 사람은 지치고 힘들 때 가끔 판단력이 흐려지며, 본인도 자신에게 호의적인 누군가에게 분풀이를 할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친구 왈 : 엄마를 생각해 봐. 퇴근하고 집에 오면 별 것도 아닌 말에 신경질 부리게 되지 않니? 나에게 절대 해를 끼칠 거 같지 않은 사람. 전적으로 내가 어떤 실수를 해도 이해해 줄 것 같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치부를 보이는 건 비단 너뿐만이 아니란다.)


그러니까 그놈에 자기혐오를 좀 멈추라고. 나는 코를 킁킁 거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친구는 그래도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았니, 시간이 좀 빨리 가지 않았니, 조금만 버티면 주말이잖아 등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


"네가 그 진상들이랑 다른 건 잘못됐다는 걸 안다는 거야. 진상들은 그게 당연한 줄 알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든 본인의 진상짓을 영웅담처럼 풀어낼 거야. 안 된다는 거 말로 조져서 해결했다고. 근데 넌 다르잖아. 사과했고, 앞으로 안 그런다고 스스로 다짐까지 했잖아. 그럼 된 거야. 잡생각 하지 말고 잠이나 자."


라고 끝인사를 전했다.

나는 가만히 침대에 누워 친절한 그 고객의 음성을 떠올렸다. 그 하루 중 유일하게 내게 친절을 건네 준 고객이었다. 그런 분을 감히 만만하게 보고 까칠하게 대했다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반성하고 꾸역꾸역 꿈나라로 떠날 짐가방을 챙겨 들었다.




고객님.

다시 한번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퇴사하는 날까지 언제든 다시 전화 주시면 최선을 다해 친절하게 답변드릴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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