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인 포지션 제안
며칠 전 제안이 왔다. 내가 이력서를 열어뒀던가? 닫았다 열었다 하니 기억이 안 났다. 인물 분석 기사를 써달라는 거였다. 경영경제지 인물 프로파일 기자를 프리랜서로 찾는단다. 전면 재택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재택. 인물에 대한 취재 경험이 있으면 우대한다고. 마음이 동하지 않아 못 본 척했다. 헤드헌터가 제안한 거라고 해도 어차피 기업에서 떨어질 게 뻔하기도 하고.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비교 견적으로 이력서를 채워 주긴 싫다.
아침에 이 얘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웃으며 "재밌겠네" 한다. 내가 싫어할 줄 알고 일부러 그러는 거다. 나는 "거뜬하지. 옛날에 보험왕도 여러 명 만나봤어" 하고 응수했다. 다 옛날 얘기지만.
인물 취재, 인터뷰는 내용에 따라 성격이 다르다. 진행 방법도 글 쓰는 방식도 결과물도. 당연한 얘기지만 당연하게 그렇다. 사람을 만나기 전에 완성본에 들어가야 할 내용은 어느 정도 그려진다. 그런 그림이 있어 만나는 거니까. 어떤 사람은 만나 보면 딱 그만큼을 보여준다. 그 이상은 없어서 그런 것인지 보여주기 싫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난생처음 한 번 만난 자리에서 내 입이 터지게 한다. 배고픈 사람처럼 먹는다는 뜻은 아니고 왠지 들떠서 말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취향이나 성격일 수 있고 사람의 매력일 수도 있다.
인터뷰는 어떤 목적을 두고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쏟아내는 일이다. 정중하면서도 무례하고, 친밀하면서도 공적이다. 일대일 인터뷰, 일대다 인터뷰 그리고 구술기록. 모두 마찬가지다. 적어도 내 경험치 안에서는 그랬다. 너의 말을 내가 듣고 싶어라는 따뜻한 마음과 일은 일이라는 냉철한 마음이 같이 있었다. 어쨌든 목적이 있어서 만난 자리니까.
예전에 구술기록하러 가기 전날 회사 대표와 싸운 경험이 있다.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어디 동네 사람들을 만날 건데,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았다. 내일 간다는 말도 오늘 들은 참이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내일 가는 걸 알아요?
-가면 어르신들 모아준대.
-인터뷰할 거라는 걸 모르고 계세요?
-그냥 가도 돼.
-저희가 누구인 줄 알고요.
-구청 사람이 소개해 줄 거야.
-무슨 내용을 들어야 하는데요?
-그냥 그분들 얘기를 들으면 돼.
대충 이런 대화가 오갔고 나는 흥분해서 화를 냈다. 결국 나중에 결과물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 결과물은 내가 써야 할 테고. 여럿이 가서 여럿의 얘기를 그냥 듣고 오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는 일할 수 없다고 하자. 왜인지 나더러 인터뷰 안 해 봤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사람 만나기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것을 알고 내가 거기에 가기 싫어 그러는 줄 알고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건 보통 인터뷰가 아니라 아카이빙이라서 목적을 갖고 접근하면 구술기록에서 경계하는 '약탈적 인터뷰'가 된다고 나를 가르쳤다. 그게 뭔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라포 형성도 없이 내용만 쏙 빼가는 인터뷰를 말하는 거였다. 그래서 더 기가 찼다. 내가 약탈하자고 했나. 이 사업을 따온 게 누군데. 의뢰한 기관에서 의도하는 게 있을 게 아닌가. 어디에 쓸 건지 알려주지도 않고, 어떤 질문을 받을지도 몰랐던 사람이 즉석에서 뱉은 말을 갖다 쓰는 거야말로 약탈 아닌가. 애초에 구술기록과 어울리지 않는 상황인데 그 말을 갖다 붙이는 것부터 탐탁지 않았다.
화를 낸 효과(!)가 있었는지 대표는 다음 날 간략한 질문지와 명찰을 준비해 왔다. 대표의 예상과 달리 그날 인터뷰는 반쪽짜리였다. 날씨가 추웠고 생각보다 사람들이 모여주질 않았으며 모인 사람이 다양하지 않았다. 나는 이후에 그 사업에서 빠져 결국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모른다. 다만 내가 빠졌으니 아마 잘 굴러갔겠지 했다.
사람인 포지션 제안 메일 한 통이 과거를 소환했다. 내가 지난날 했던 인터뷰들을 떠오르게 했고, 내가 하고 싶은 인터뷰는 과연 뭘까 하는 생각을 퍼올렸다. 이 글이 미완인 것처럼 내 생각도 어중간한 상태에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