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일어났던 주요 사건들 기록하기
나는 대학시절 큐레이터학을 전공했다. 이 학과에 진학하기 전까지 큐레이터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커리어를 밟아갈 수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만약 도서관에서 우연히 ‘큐레이터’라는 직업 관련 서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평생 몰랐을 길이었다.
큐레이터학과는 한 학년에 30명 정도의 작은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름만 대면 알법한 박물관부터 작은 갤러리를 운영하는 집안의 자제들도 꽤 있었다.
4학년 졸업을 앞둔 시점, 대부분의 동기들은 자연스레 대학원 진학을 택했다. 당연히 박사 학위를 가져야만 ‘큐레이터’라는 자격이 주어지는 듯했다. 국내 대학원을 선택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해외 과정을 밟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그저 본인의 의지와 선택에 달린 문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경우, 큐레이터라는 꿈을 포기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기 전까지 나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포기’란걸 해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과 좋은 환경 덕분이었다. 대단한 부자는 아니었지만 풍족했던 유년시절을 보냈다. 먹고 싶고, 하고 싶고 그리고 사고 싶은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다. 백화점에서 브랜드 옷을 사는 것이 당연했고, 종종 엄마는 직접 코트를 만들어주시곤 했다. 학교에서 필요하다고 하면 오르간을 기부하기도 했고, 고등학교 3학년 시절 갑자기 미대를 가고 싶다는 변덕에 국영수 과외뿐만 아니라 미술학원까지 다녔다. 대학시절 쉴 새 없이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그만큼의 용돈도 받았다. 언니도 어학연수를 다녀왔으니 나 또한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뉴질랜드로 1년을 나가있기도 했다.
이 모든 게 엄마 혼자 우리 둘을 돌볼 때의 일이다. 가세가 기우는 것은 필연이었다.
철부지였던 나를 너무 사랑했던 엄마의 입에서 ‘안된다’라는 단어가 나온 것은 내가 대학원 이야기를 꺼냈을 때였다. 처음이었다. 이유는 당연하고도 심플했다. 10년을 일해도 일반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의 초봉도 못 버는 직업에 석사며 박사라니. 그 학비와 시간을 또 투자해 달라니.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엄마에게 너무 가혹한 부탁이었다. 그런 엄마의 마음도 모르고 나는 홀로 방 안에 갇혀 눈물 콧물을 뺏다. 마치 엄마로 인해 나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듯이.
그 이후에도 나보다 상대방이 원해서 헤어진 이별처럼 꽤 오랫동안 미련이 덕지덕지 붙어 잘 떼어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공부를 위해 밤낮없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취업해 돈을 모은 다음 다시 공부를 시작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나에게 큐레이터란 꿈은 그 정도의 사랑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의 눈물 콧물은 그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답답함과 짜증이 뒤섞인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았을까? 현실이라는 것과 타협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그게 무슨 감정이었든 확실한 건, 나는 비겁했다. 고생길을 걸어갈 만큼의 용기도 없으면서 현실과 주변 사람들을 탓했다. ‘꿈’이라 말해왔던 시간을 외면하고, 때가 되면 이룰 수 있을 거라 회피했다. 지금도 ‘타의에 의한 포기’라 명명하며 합리화가 필요하니 이보다 더 못날 수 없다. 그리고 이건 단연 10년 전 나뿐만 아니라 현재의 나에게도 해당되는 모습이다.
그동안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얼마나 좁히며 살아왔나. 그저 허상이 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는데 여전히 나의 발은 허공에 떠있다. 그걸 알면서도 땅에 닿기 위해 내 발을 묶는 노력과 용기조차도 주춤하게 된다.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어려운 것처럼 여전히 비겁한 내 모습에 어떤 합리화가 적절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