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의 사진 앱을 쓰다 보면 <과거의 어느 한 때>를 큐레이션 해서 보여주곤 한다. 그건 바로 10년 전 오늘일 수도 있고, 어떤 특정한 기간이기도 하고, 때로는 가족 중 누군가를 모아놓은 사진첩일 수도 있다.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꽤 많다. 이메일을 처리하고, 일정을 잡고, 인공지능에게 질문을 하고, 지도를 이용해서 원하는 곳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기능이 바로 이 사진첩이 제공하는 과거로의 여행이다. 지나가버린 시간과 장소에 대한 미련은 아니다. 그저 잊고 지냈던 순간을 떠올려 주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혼자 보면서 추억에 젖을 때도 있고, 가족과 함께 보며 깔깔 거리기도 한다.
‘맞아, 이때 참 즐거웠는데’, ‘이거 진짜 웃긴다’ 하면서 당시의 감정, 말투, 행동까지 고스란히 기억에서 소환되는 것이 신기하다. 어떻게 보면 가장 첨단의 기술이 집약되고 고성능을 발휘하는 스마트폰의 차가운 외형과 달리 제일 감성적인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에 대한 만족감이 크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몇 년 전인지 특정하기 어려운 - 대략 7,8년 전으로 추정되는 - 태국 여행에서 아내와 아들이 크게 다툰 적이 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꽤 큰 다툼이었는데 말이다. 그저 울분(?)을 참지 못한 아내는 눈물까지 흘렸고, 우리는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도 단지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세 가족이 함께 식당을 찾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트콤 같은 상황이다. 화가 났지만 먹을 것은 먹는다. 어떻게 메뉴를 골랐는지, 음식엔 만족했는지도 모르는 일처럼 되어 있다. 가라앉았던 기분과 여행을 망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은 어렴풋하다. 그러나 탄수화물이 들어가서 기분이 좋아진 건지 알 수 없지만 식당을 나올 즈음엔 각자의 기분이 풀렸다.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찍은 ‘노을 속 아들의 웃는 표정’을 보면 그때 사건이 묘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회상은 아무래도 약간 치장이 되기 마련이다. 기억이란 왜곡되기 쉬울뿐더러, 자기중심적으로 편집되곤 하니까 아내와 아들의 기억은 나와 다르게 저장되어 있을 듯 싶다.
전에 적어 두었던 노트들을 뒤적이다가, <감사 일기>라는 제목의 노트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감사 일기?’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내가 이런 걸 썼다고? 대체 왜? 그리고 아니 언제? 사진첩이 제공하는 이미지(어떤 순간의 기록)는 정확하지는 않아도 대강의 상황들이 연상되는 편인데, 이렇게 실마리를 알 수 없는 제목은 처음이었다. 노트 제목을 누르고 들어가 보니 고작 열두 개의 글이 적혀 있었다. 12일치를 쓴 것이다.
예전에 페이스북 친구이자 동료의 요청으로 ‘릴레이 감사 일기 쓰기’를 해본 기억은 분명하다. 그때 이후에 이런 걸 내가 했을뿐더러 기록으로 남겨두기까지 했다니 놀라웠다. 릴레이 일기로 세 번 정도인가를 해보면서, 감사 일기라는 것이 뻔한 내용을 뻔하게 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억지로 쥐어짜는 느낌도 없진 않아서 써보니 정말 좋더라, 이런 감동을 받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랬던 내가 자발적으로 감사 일기를 12개나 남겨 두었다니 놀라웠다. 약간은 설레는 마음으로 하나 하나 열어 보았다. 1일 차에는 내가 왜 감사 일기를 쓰게 되었는지 소개가 되어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가 이걸 했다는 행위의 기억은 12일을 누를 때까지도, 그리고 글을 쓰는 지금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1일
슬기로운 감정생활이란 책을 끝냈다. 감사 일기를 써보라는 작가이자 정신과 의사의 제안에, 나도 한 번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감사 일기를 시작해 본다. 요즘 코로나 블루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감에 따른 호르몬의 변화인지, 두 가지 모두의 영향인지 우울한 기분이 늘 있었다. 일을 하면서도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 역시 한몫했다.
그런 와중에도 글을 쓰고, 월급을 받고, 또 코로나를 핑계로 집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고, 운동도 챙겨서 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내 욕심이나 환경의 문제로 돌리지 말자.
테니스 치러 갔다가 정신 지체가 있는 어린아이를 본 적 있다. 그때 우리 아들은 아무 문제 없이 잘 태어나 준 것만으로도 참 고마워하지 않았나. 감사란 멀리 있지 않다. 조금씩 매일 많은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기로 다짐해 본다.
3일
어제는 감사일기를 쓰지 못했다. 쓸 시간이나 기회는 당연히 있었지만 막상 쓰기가 귀찮았다. 작심삼일이라고, 참 어떤 마음먹은 일을 꾸준히 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인가 보다.
오늘은 다시 감사일기를 쓸 수 있음에 감사해 보기로 한다. 고개를 들어 날씨가 맑은 것도 감사한 일이고, 오늘 새로운 세입자가 될 수도 있을 낯선 이들에게 여유롭게 집을 보여줄 수 있는 상황에도 감사하다. 무사히 아내의 생일을 위한 미역국을 잘 끓인 것도 감사하고, 인터넷 전화로 아들의 새로 전학 갈 학교에 전화해서 필요한 서류를 알아본 것도 감사하다.
작은 것에 계속 감사하면서 좋은 얼굴을 갖고 싶다. 찌푸리고 귀찮음 가득한, 나이 든 중년의 얼굴은 싫다.
아들에게도 더 친절하게, 감정을 내 맘대로 던지지 말고 따뜻하게 대해주자.
4일
어제는 사실 기분이 매우 안 좋았다.
요즘 들어 나의 멘털, 자존감이 무척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작은 말에도 괜히 혼자 꽁해지고 필요 없는 수준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떤 일과 그것이 잘 안 되었을 때, 안된 일을 나의 실패로 동일 시 하는 것이 문제다. 일이 안된 것은 그냥 그런 것뿐이고, 내 인생이나 삶의 방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물론 가끔 마치 내가 다 잘못한 것처럼 비난, 공격받을 때도 있다. 그러면 정말 내가 뭘 그리 잘못 살아왔나 싶다).
일의 잘못,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음을 내 인생의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고 분리하자. 그렇게 살아가면 될 것이다.
오늘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나 자신의 노력에 감사하고 칭찬한다.
5일
어제의 머리카락 자른 것에 감사한다.
이발이 대수겠냐마는, 가끔 어이없는 실력을 가진 초심자들에게 머리를 맡기게 되면 영 이상한 헤어 스타일을 갖게 된다. 또는 두 사람 사이의 소통 오해로 인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결과가 나온다. 다시 시간을 되돌려 자르기 전의 상황을 만들 수 없는 불가역 반응이므로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어제 내 머리카락을 자른 미용사는 손은 비록 느렸지만 결과물이 맘에 든다. 결과가 좋으니 손이 느린 것은 내게 문제가 안된다. 어쩌면 싱가포르에서 자르는 마지막 헤어컷이 될지도 모르는데, 맘에 드니 좋다.
9일
오늘은 어느덧 많이 사라진 우울감에 대하여.
나를 괴롭게 하던 우울감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아내 말처럼 매년 이 맘 때쯤 찾아오는 연례행사였는지 (나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면 감사일기라는 걸 쓰면서 마음속에 작은 변화가 시작돼서였는지,
이소라의 노래를 듣고, 마음에 관한 글을 쓰면서 해소가 된 건지.
이유가 무엇이든 괴롭던 날들이 사라지고
그냥 무난하지만 아무 마음 무겁지 않은 하루를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래, 이렇게 사는 거지 라는 생각.
아내나 아들에게 더 친절해지지는 않았지만
괜한 짜증과 화냄을 안 하게 되어 그게 참 기쁘다.
읽어보니 주재원 생활을 마치는 해였다. 싱가포르의 마지막 생활은 코로나와 함께였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6년 전의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했었다(고 쓰여 있다. 그랬나 보다). 아내 생일이라는 말이 있으니 11월 즈음이었던가 보다.
일부러 숨겨 둔 것도 아니었는데 우연히 발견한 타임캡슐을 발견한 것처럼 기쁘다. 그러나 정작 내용은 좀 우울했던 당시의 내가 기록되어 있어서 썩 즐겁지가 않았다. 생각난 김에 당시 사진첩을 들여다 보았다. 싱가포르를 떠나기 전이라 이곳 저곳 다닐 수 있는 곳을 열심히 돌아 다니고, 맛있는 것을 먹었던 기록들이 가득하다. 대체 당시 내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다행히도 1일 차에 언급된 <슬기로운 감정생활>이란 책 제목을 보니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용보다는 책의 표지 밖엔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감사 일기의 내용에서 유추해 보건대 들쭉날쭉 했던 마음을 다스리고자 의도적으로 읽은 책이 아니었을까 싶다.
짧게 쓰인 것이라 금방 읽을 수 있었다. 덕분에 빠르게 내용을 알 수 있었는데 막상 12일 이후엔 내용이 없으니 괜히 섭섭하고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발견될 줄 알았다면 그때 열심히 더 많이, 길게, 상세하게 써둘 것을. 게을렀던 과거의 나를 이제와서 괜히 자책해 본다.
브런치든 어떤 매체든 목적성을 가지고 글을 남기는 것의 유용함이 분명 있다. 남에게 읽힐 것을 전제로 쓰는 글이 가져야 할 미덕이 있다. 그러나 온전히 나만을 위해서 썼던 - 그럼에도 기억 속에서도 완전히 잊혔진 것이 신기하지만 - 오늘 우연하게 찾은 과거의 <감사 일기>가 주는 울림 또한 잔잔하면서도 강력하게 다가온다. 우울했던 감정이든, 싸웠던 순간의 기억이든, 즐겁고 화려했던 과거의 기록이든, 그것들이 모두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앞으로도 기록해 두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과거를 만들고 싶지 않다. 어쩌면 그것이 현재의 내가 여전히, 그리고 열심히 글을 쓰고 기록을 남겨 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