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월의 영화를 결산하기 위한 글이다. 이런저런 일로 바빠 집에서 영화를 본 일 보다 약속에 나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일이 더 많았던 지난 두 달이다. 주제를 정해 맥락 안에서 여러 편의 영화를 연달아 보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하지만 관련 자료를 찾아보며 장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일이 바쁘다 보니 오히려 의무적인 것이 아니라 진짜 원하는 영화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니저러니해도 내게 영화는 힐링이다.
1. 대런 애러노프스키, <더 웨일>
어떠한 배경 변화도 없이 하나의 공간, 인물, 대사만으로 진행되는 연극적인 형식의 영화다. 폐쇄된 공간 한가운데 놓인 소파, 사르트르의 <닫힌 방>에서 지옥문이 천국문으로 바뀌었다. 결국 타인은 서로에게 관심 갖지 않을 수 없다는 메시지로 ‘세상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비관론을 전복한다.
이 영화에서 솔직함이 세상을 구원한다. 천국 문턱에 걸린 고래 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앨리의 솔직함이다. 처음에는 그저 상황을 악화시키고 파멸로 몰고 가는 듯 하나 자기도 모르는 새 메시아의 역할을 수행한다. 앨리의 엄마가 딸을 묘사하는 단어인 ‘Evil'을 뒤집으면 ‘Live’라는 유치한 말장난이 떠오를 만큼 악마의 모습으로 천사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기묘한 이야기>의 세이디가 떠오르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잘 이해됐는지도 모른다. 결국 등장인물 중 천사의 손가락이 닿던 순간에 가장 가까운 건 앨리니까.)
찰리는 리즈를 포함해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고 관심 갖는지 모른다. 누구도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의 진실에 다가가길 원하면서도 스스로 드러내는 일에는 극도로 거부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들은 무신경하고 역겹다는 표정을 지을지언정, 마음을 말로 털어놓기 전부터 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인간의 혐오는 균에 대한 원초적 공포가 반영된 접촉 공포로 드러나는데, 리즈는 땀투성이인 찰리 옆에 아무렇지도 않게 기대고 헤어진 아내 메리도 적대적으로 보이나 결국 찰리를 끌어안는다. 앨리 역시 찰리가 자신의 힘으로 일어나 다가오기를, 그로 인해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대놓고 눈물을 의도한 영화이긴 하나 아름다웠다. 브렌든 프레이저의 재기와 세이디 싱크의 인터뷰 등 영화 외적인 드라마도 감동적이었고... 홍 차우가 소위 메이저 영화에 자주 출연하게 되어 기쁘다. 번역도 좋았는데 역시나 황석희 번역가였다. 간추린 문장들도 있었지만 훨씬 자연스러운 대화체 느낌. 캐릭터 하나하나가 살아있다. 배울 점이 많다.
아쉬운 점을 말하자면 상징에 비해 플롯이 약하고 인물의 디테일이 부족해 완성도가 떨어진다. 엔딩은 유치하기까지 한 느낌. 소재를 차치하고 인물에 공감되지 않는다는 비평이 이해되는 이유다. 애러노프스키는 <파이>, <블랙스완> 등에서 절제된 인간의 극점을 잘 표현해 좋아하던 감독이었는데 성경 전복을 시도하다 되려 잡아먹힌 느낌이었던 <마더!>에서부터 실망의 연속이다. 이제는 기대감을 조금 내려놓아야 할지도?
2. 두기봉, <흑사회> 1, 2
신경 써서 보지는 못해 할 말이 많지 않다. 그저 나의 첫 두기봉 영화였는데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유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 정도. 자극적인 소재치곤 전반적으로 정적인 분위기에 수많은 인물들이 구분하기 어렵게 엉켜있는 형세라 집중하는 데 노력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의 다른 작품도 보고 싶다. (같은 이유로 관람에 실패한 영화에는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있다. 어떻게 영화가 러시아 소설)
고증에 공을 들였다는 삼합회의 압도적인 모습, ‘록’이라는 미친 인물의 카리스마 등 관람한 지 시간이 꽤 지나도록 기억에 콱 박힌 여러 요소가 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편과 2편을 가로지르는 연출이다. 특히 자상하기만 했던 아버지 록의 살인 장면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겁에 질려 도망치던 아들의 뒷모습과, 학교에서 겉돌고 양아치들에게 돈도 뜯기다 현장에 아버지가 부하들을 대동하고 나타났을 때 그곳에서 도망치던 아들의 뒷모습이 겹치며, 대사 한 마디 없이도 아들과 아버지 모두에게 새겨진 깊은 트라우마가 드러난다.
이외에도 1편 주인공 록과 2편 주인공 지미의 최후를 생각할수록 조직과 명예란 족쇄에 불과하며 결국 가장 원치 않는 이가 자리를 얻게 되는 아이러니에 몸서리치게 된다. 예상 가능한 전개임에도 손에 땀을 쥐게 되는 것이 클리셰가 아니라 클래식이라는 증거.
3. 존 랜디스, <런던의 늑대인간>, 데이빗 크로넨버그, <더 데스 오브 크로넨버그>, 죠 단테, <늑대여인의 음모>
도대체 뭘 보고 다니는 거냐는 생각이 드는 라인업이다. 모종의 이유로 늑대인간에 꽂혀 <런던의 늑대인간>을 보다가, 여기에 등장한 조악하면서도 최선을 다한 변신 장면 때문에 바디호러 테마 상영회가 시작되었다. 물론 바디호러 하면 크로넨버그 아니겠나. 볼 만한 건 이미 다 봤기 때문에 특이하게 본인이 출연한 단편을 관람했다. 1분간 크로넨버그가 자신의 시체와 마주하는 내용이다. 짧지만 그가 육체와 죽음,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엿볼 수 있었다.
세 번째로 관람한 <늑대여인의 음모>는 놀라울 정도로 기억에 남지 않는 영화지만 이것 역시 변신 장면에 공을 들였다. <런던의 늑대인간>과 동일 연도에 개봉한 영화인데 80년대 특유의 펌프를 사용한 신체 변형 특수 효과가 지금 보기엔 허술해 보일지라도 그 당시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웃긴 동시에.. 웃기다. 유튜브 링크를 삽입해 놨으니 궁금하면 클릭해 보시길. 바디호러에 관련된 아티클도 몇 개 찾아봤는데 그중 많은 유명 바디호러 장르 영화가 인용되어 있는 글 하나를 소개한다. 영어긴 한데..
4. 스티븐 스필버그, <파벨만스>
<놉>과 <바빌론>에 이어 또 하나의 '영화에 대한 영화' 대작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반으로 만들었다는 영화를 관람하며 ‘이거 내가 봐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자신의 영화 여정을 말하기 위해 빼놓아서는 안될 이야기였던 거겠지. 관람 처음부터 끝까지 복잡한 마음이었으나 어떻게든 몇 문장 안에 눌러 담아봤다.
'어떤 목격은 그 자체로 폭로이자 배반이 되고 어떤 편집은 그 자체로 은폐이자 증언이, 그리고 다시 배반이 된다. 수천 번이고 반복된 이야기지만 스필버그는 이 저주받은 삶에 장난스런 손짓으로 구멍을 내 관객에게 보여준다. 그는 이제 겨우 20여 년을 풀어냈을 뿐이다. 아무리 거장이라도 편집을 끝내지 못한 추억을 고백하기란 힘들었던 게 아닐까? 영화를 만듦으로써 가족들을 찢어버리고 말 거라던 보리스 삼촌의 경고가 여전히 머릿속에 맴돈다.'
창작자는 자주, 쉽게 현실에 협박당한다. 창작물을 종종 아이에 비유하는데 가족들 입장에서는 갓난아기를 같이 키우자는 게 아니라 숨겨놨던 장성한 아이의 존재를 갑자기 알게 되는 것에 가깝다. 저에겐 사실 이렇게 자란 아이가 있답니다…. 누구라도 이 아이의 출처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5. 이원석, <킬링 로맨스>
으...
간만에 극장에서 본 한국 영화다. 예고편이 나왔을 때부터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더 이상하고 괴랄하며 재미있는 영화였다. 영화의 특성.. 치곤 상영관 안에 꽤 많은 관객이 있었는데 처음부터 폭소를 터뜨리는 등 반응이 좋아 나도 유쾌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혼자 봤으면 오히려 갑분싸였을 수 있겠지만 옆에서 먼저 웃어줘서 좋았다. 친구와 분석해 봤는데 상영관이 줄어드는 상황에 여기까지 찾아온 관객이라면 여간 마음이 열려있는 게 아닐 거라는 결과가 도출됐다.
<로얄 테넌바움> 등의 웨스 앤더슨 영화가 떠오르는 색감과 연출 사이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폭력이 들어가 있다. 종종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적당한 긴장감 덕분에 너무 정신 빠진 느낌은 아닌.. 기묘한 밸런스가 있는 영화였다.
오로지 이하늬의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존재감이 강렬했으나 주변 인물들 역시 모자라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시나리오도 나쁘진.. 않지만 배우들의 힘이 컸다. 나도 여래바래 가입하고 싶음... 그리고 심달기가 타조 목소리 연기한 거 아셨음?
6. 딘 플레이셔-캠프, <마르셀, 신발 신은 조개>
너무 귀여운 영화다. 놀이동산에서 갓 튀어나와 세상을 배워가는 마스코트 같은 느낌. 보면서 계속 이 작은 녀석이 뭘 한다고.. 이 쪼끄만 조개가 어딜 간다고... 하며 전전긍긍했다. 무턱대고 행복하지만은 않은 전개 덕에 엔딩의 감동이 더 극대화된 것 같다. 마르셀 목소리 역을 맡은 배우 겸 코미디언 제니 슬레이트(<에에올>에도 출연했다고…)가 감독과 함께 동명의 단편 시리즈 각본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이 유산이 모여 훌륭한 장편이 탄생한 것 같다. 할머니 코니의 우아한 목소리가 어딘지 익숙하다 싶더니 <블루 벨벳>의 이사벨라 로셀리니였다. 낯설면서도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feel good movie.
요즘은 끌리는 대로 영화를 고르고 있다. 어디선가 본 밈에 ‘보고싶어요’ 목록에 몇 개월 동안 들어있던 영화 대신 3분 전에 처음 들어 본 영화를 보곤 한다는 게 있는데 그게 딱 나다. 물론 검증된 명작 리스트보다는 성공 확률이 낮지만 나도 자유 의지가 있는 인간이라는 게 실감난다.(?) 아녜스 바르다의 인터뷰를 담은 책을 읽고 있다. (사실 사놓고 1장도 다 못 읽음) 앞으로 영화에 대한 책을 조금 더 많이 읽어볼 예정. 그러면 내 글도 더 풍성해지겠지! 콘텐츠는 내 옆에 안전하게 차곡차곡 쌓이지 않는다. 점점 깊어지는 늪에서빠지지 않도록 분투하며 하나하나 밟고 겨우 올라올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