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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ㅁㄱㅍㅇ Mar 11. 2023

낮잠 1/6

1,2월 영화 결산


영화는 종종 꿈에 비유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암막 커튼을 치고 모두가 숨을 죽이는 영화관 경험이 수면, 그리고 꿈과 닮아있다. 인간은 그렇게 자발적으로 동굴에 들어가 짧은 낮잠을 즐기고 나온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불이 켜지고 문이 열리고 차가운 복도로 나서는 순간 현실은 아침 햇살처럼 밀려들어온다. 그 기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달콤하다.


올해 여섯 번에 걸쳐 영화 결산을 하기로 했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영화는 쿨하게 넘어가고 기억에 남는 것만 모았다. 원래 꿈꾼 내용 다 기억하는 거 아니잖아요(궁금하다면 동명의 왓챠피디아 계정을 팔로우하세요!) 



*스포일러 주의!



1. 아녜스 바르다, <행복>


1월 1일에 시청했다. 행복한 제목, 꿈결 같은 영상과는 달리 불행의 끝을 보여주는 내용이라 <행복>이라는 간결한 단어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작년에 불륜 영화로 그렇게 고생(?)을 해놓고 올해 첫 영화도 불륜 영화라니...


바르다 카메라는 무엇이든 아름답게 비춘다. 그렇기에 그의 다큐멘터리마저 ‘영화처럼’ 아름답다. 가부장제 고유의 이미지 속에 대입되고 대체되고 대상화되는 여성의 모습, 이에 대한 어떠한 문제의식도 없는 남성의 시선을 아녜스 바르다 특유의 글자, 색깔, 짜깁기 기법으로 표현했다. 수작임에 확실하나 보는 내내 너무 괴로웠고, 명백하게 보이는 클리셰를 일부러 사용했음을 느끼면서도 지루했기에 별점이 그리 높지 않다. 부도덕한 내용이 나온다고 평가를 낮게 줬던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이건 꽤 강력했다. 개봉 당시에도 호평과 혹평이 함께 쏟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불편하게 만들기 위한 영화’로서의 목적은 훌륭하게 이뤄냈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바르다 영화는 <방랑자> 이후 처음이었는데, 장난기 어린 모습만 보다 무겁고 진중한 모습을 보니 낯설기도 하다. 맘에 쏙 드는 영화는 아니지만 무언가 수정하고 싶다는 느낌도 없다. 시나리오의 힘이다.



2. 이노우에 다케히코, <더 퍼스트 슬램덩크>



하아아아아.... 나의 슬램덩크 역사는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삼촌 집에 만화책 전권이 있었는데 농구 룰도 몰랐던 어린 나는 1회 차 완독하고 '이거 완결이 안 난 건가?'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머릿속에 아직 완결이 나지 않은 만화로 기억하다 한 8년쯤 후인가 진실을 깨달았다. 그게 완결이었던 거다. 그렇게... 북산의 이야기는 끝난 것이다, 거짓말처럼... 극장판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극장으로 갔다. 2D도 아니고 3D도 아닌 낯선 질감의 영상을 보며 어색해하던 것도 잠시, 머릿속에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거... 산왕전이었나?' 그 후 러닝타임 내내 감상을 생각할 새도 없었다. 나는 북산고 학생이 되었고 농구부원이 되었고 송태섭이 되었다.


게임 '보더랜드'와 비슷한 스타일의 그림은 45도 각도에서 얼굴이 뭉개지는 느낌이 있긴 했으나 움직임 표현이 훌륭해 환상적인 경기 장면을 만들어냈다. 사실 등장인물의 과거사에 별 관심은 없었지만 적절하게 삽입되어 긴장감을 조절했고, 경기 장면의 박진감과 회상 장면의 잔잔함이 좋은 리듬을 이루었다. 특히 감탄한 것은 음향이었는데, 스포츠 경기나 스포츠 애니메이션은 선수들과 팬들의 심장박동을 느끼기 위해 보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 애니는 그것을 아주 잘 캐치했고 멋지게 표현했다. 코트 바닥에 농구화가 끌리는 소리, 캐릭터들의 박동하는 근육, 화면 전체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마치 현장에 있는 듯 생생했다. 과연 감독이 한 땀 한 땀 공들인 정성이 보인다.


더빙판과 자막판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었는데, 일본 성우가 조금 더 중후한? 편이었다. 강백호보다 사쿠라기가 훨씬 더 양아치 같음. 슬램덩크는 역시 폭력물이 맞다...


원작에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당연함. 원작자가 만들었음. 근데 더빙, 자막 두 번 보는 동안 쿠키 있는 줄 몰랐음. 왜 아무도 말 안 해줌? 님들에게 크게 실망함...



3. 카린 쿠사마, <이온플럭스>



백신 부작용으로 재생산 능력을 잃게 된 인류가 인간 복제를 통해 그 역사를 유지한다. 지도부는 이를 비밀로 하며 국가를 통제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자연에 적응한 인류는 재생산 능력을 회복하나 국가는 현상 유지를 위해 무력을 사용해 이를 은폐하려 한다.


딱히 좋아서 기억에 남는 건 아니고 너무 괴랄해서 인상 깊었다.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사람치고 너무나 눈에 띄는 기괴한 의상은 둘째치고, 반란군은 대체 뭐 하는 놈들인지 제대로 나오지도 않고 아는 것도 없어 보이며, ‘완벽한 국가’를 자처하는 것치고는 너무나 약한 가드들과 놀라울 정도로 약하게 나오는 남성들 등 모든 부정적인 요소가 합쳐져 보는 사람의 기운이 쏙 빠지게 만든다. 원작 코믹스를 보지 않아 확실치 않지만, 강한 여성 캐릭터와 와패니즘적 요소 등을 보면 감독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옛날 영화치곤 인종 다양성도 (나름)챙겼지만 아쉬운 게 더 많다. 이 영화를 보니 갑자기 <007 노 타임 투 다이>에 대한 분노가 차오른다. 그럼에도 샤를리즈 테론의 비주얼과 저항적 SF 메시지에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2점 아래로 내리지는 못했다. 어떻게 영화가 매트릭스 엑시스턴스 반지의 제왕 놉? 크로넨버그가 찍은 매트릭스 같다.


뻔하디 뻔한 SF 영화에 등장할 수 있는 모든 단점이 등장한다. 재생산에 대한 집착, 노아의 방주, 아담과 이브 언제 버릴 거임. 이것이 남성 빌런의 동기로 나왔다는 점은 별로지만 여성의 공포로 나오지 않았다는 점은 좋다. 정신이 좀 없어서 그렇지, 서사는 놀랍게도 나름대로의 개연성이 있다. 그저 인간 중심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선이 한계일 뿐. 같은 감독이 <죽여줘! 제니퍼>도 찍었다는 게 흥미로우면서도 무슨 맥락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지는 이해된다. 새로 나오는 레이첼 바이스의 <데드 링거> 시리즈도 맡은 것 같던데 잘 뽑아 주길.



4. 데미언 셔젤, <바빌론>



데미언 셔젤이 채소연처럼 나와서 '영화... 좋아하세요?' 하고 묻는 영화. 그럼 난 그냥 강백호처럼 '하하하, 물론이죠. 제가 이래 봬도 시네필이라구요, 하하하' 하면서 근육 자랑을 한다. 그러다 영화 끝나면 탈진해서 눈물 흘리면서 '정말 좋아해요... 이번엔 진짜라구요' 하게 되는 영화.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 바빌론, 영화와 롤러코스터



5. 조지 로이 힐, <스팅>

‘레이더스’ 등을 그렸던 삽화가 리처드 앰셀(Richard Amsel)이 레이엔데커(J.C.Reyendecker) 스타일로 그린 <스팅> 공식 포스터

누군가의 눈동자 색을 묻거나 칭찬하는 건 미국에서는 흔한 추파라고 한다. 그만큼 상대에게, 상대의 시선에 관심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유명 고전 배우가 자신에게 접근하는 이성에게 자기 눈 색을 맞춰보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나는 크리스 파인이나 엠마 스톤처럼 눈이 커다랗고 쨍한 게 아니면 눈 색에 관심도 없고 잘 구분하지도 못한다. 딱히 취향도 없는 편이고… 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의 눈동자 색에 시선을 떼지 못한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이 영화다.


폴 뉴먼을 아는가? 난 사실 이름만 유명하다고 들어보고 출연작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가 출연한 영화 중 시청한 것은 <로드 투 퍼디션>이 유일했는데 뒷심이 부족해 ‘매우 아쉬움’ 리스트에 들어있다. 폴 뉴먼이 ‘존’ 역할을 맡았다는데 뭐 하는 사람이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하지만 그는 말론 브란도와 함께 종전 이후 할리우드를 주름잡은 남자 배우다. 반항적인 양아치 이미지의 말론 브란도와 대조되게 성실하고 신사적인 이미지였고 어쩌고 하는 내용이 많은데 뭐, 중요한 건 앞으로 볼 영화가 잔뜩 남았다는 것 아닐까? 나의 캘린더에 ‘폴 뉴먼 주간’ 일정이 추가된다.


30년대 미국 주간지 스타일의 포스터와 어울리게 영화는 시종일관 장난스럽고 쾌활하지만 촘촘한 복선으로 긴장감을 자아낸다.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있는 건 로버트 레드포드와 투톱으로 극을 이끌어나가는 폴 뉴먼의 얼굴이다. 그가 맡은 헨리 곤돌프는 능숙하고 여유로운 사기꾼이자 카리스마 넘치고 지적인 베테랑이다. 사기꾼답게 각종 코스튬을 입고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다.


어떻게 사람 눈이 Ocean Eyes… 아카이브여 영원하라


사실 그 외에는 적당한 유머와 로맨스, 요즘 사람이 보기엔 조금 뻔한 반전들로 이루어진 영화라 큰 감흥은 없었다. 시대를 고려하자면 음… <나이브스 아웃> 같은 거다. 입이 쩍 벌어지는 명석함은 없지만 극한의 오락성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사기극. 이 영화를 본 지도 어느새 몇 주, 내용은 빠르게 휘발되고 폴 뉴먼의 두 눈동자만이 내 머릿속에 인장처럼 남아있다.



6. 토드 필드, <타르>



‘케이트 블란쳇이 천재 마에스트로로 나오는 영화는 반드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와 함께 상영관에 들어간 관객 대부분이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클래식에 관한 예술 영화답게 연령층은 높은 편, 언뜻 음악 교수님들이 아닌가 싶은 비주얼의 무리도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하는데 순간 익숙한 대학 강의실의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현대 클래식의 이해… 수업이죠? 오늘이… 제4강… 거기 뒤에 학생 빔프로젝터 좀 켜줄래요? 네… 오늘은 지휘자, 마에스트로라고 하죠. 여성 지휘자는 마에스트’라’라고 하는데… 요즘은 그런 구분을 잘… 하지 않는 편이죠. 그래서…”


이렇게 잔잔하고 지루하게 시작한 영화는 리디아 타르라는 인간이 얼마나 유명하고, 얼마나 능력 있고,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탐욕적이고 잔인한지 보여준다. 어느 성실한 대작가의 루틴처럼 괴담으로 돌아다닐 것만 같은 리디아 타르의 일상은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분출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권력이 묵직하게 깔려있다.


하지만 리디아 타르를 난공불락의 기득권층이라 말할 수 있을까? 엘리트 교육을 받은, 명예와 부를 가진 백인이지만 아내를 둔 여성인 그는 손잡이 없는 무빙워크를 걷고 있는 형상이다. 빠르고 매끄럽지만 동시에 위태롭다. 돌탑처럼 강해 보이다가도 작은 소음에도 쉽게 취약함을 드러낸다.


나는 리디아의 분노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애초에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본 다혈질의 인물 대부분은 그가 ‘건강하다(즉, 신체, 정신적 이상이 없다)’는 가정 하에 일종의 방어기제나 생존수단으로 분노를 표출하곤 한다. 리디아 타르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어떤 일을 겪었을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가 살아남기 위해 어떤 말을 내뱉었어야 했을지 역시 그렇다. 모든 것을 가진 듯해 보이나 메일과 문자 몇 개, 휴대폰으로 찍은 몇 분짜리 동영상만 있으면 그는 곧바로 추락하고 마는 사회 질서에 종속된 존재인 것이다. 추락해야 마땅한 일을 했을 때 진짜로 추락하고 마는 것이 이 사회의 부조리다. (빌 게이츠가 화내는 거 본 적 있음?)


일련의 분출-발각-폭로 끝에 이성을 놓아버린 리디아 타르는 필리핀에서 게임 음악 콘서트를 지휘한다. 이 결말에 대한 비판이 많다. ‘백인 여성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은 아시아 국가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비꼰 시상식 사회자도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나쁜 일인가 싶지만 리디아 타르 같은 개인에게는 ‘추락’일 수 있겠다 싶다. 그만큼 잃고 그만큼 고통받고 영화 밖의 관객에게조차 조롱받았으면 된 거 아닌가? 나라고 그를 동정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도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 애초에 프레임 하나하나가 모두 그를 공격하고 있지 않은가. 리디아 타르 역시 자기 연민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프로답게’ 지휘를 이어갈 뿐이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틈도 없으니까…


그가 얻어낸 ‘타르’라는 이름은 손에 쥐기 무섭게 끈적하게 흘러내린다. 손을 펼치면 비린내가 남아있는 검은 얼룩만이 그가 이곳에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3월 중순이 다 되어 가는데 이번달엔 이사준비다 뭐다 바빠서 영화를 거의 보지 못한 데다 나의 최애 영화관에서도 멀어져 앞으로 얼마나 풍족한 글을 쓸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만큼 진심을 다해 봐야지. 나는 여전히 눈물 흘리게 만드는 영화를 찾아 헤맨다. 이번달에도 기대되는 개봉작이 많아, 영화관에 낮잠을 자러 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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