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에서 영화를 낮잠에 비유한 바 있다. 그리고 이번 리뷰에서는 롤러코스터를 영화 경험에 비유해보려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스티븐 스필버그의 신작 <파벨만스>에서 같은 비유를 사용해 영화를 말했다. 롤러코스터에 대한 언급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를 ‘꿈’으로 비유한 것만은 분명하다. 한밤의 침실처럼 어둡고 고요한 영화관이라는 공간의 특수성, 작정하고 현실을 외면하게 하는 그 맹목적인 헌신이 누구에게나 수면과 꿈의 달콤함을 떠올리게 하는 것일까? 그 꿈이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점 역시 영화와 닮아있다. 우리는 행복하려고 꿈을 꾸는 것이 아니다. 꿈이 펼쳐지는 것을 목격할 뿐.
나는 롤러코스터를 즐기지 않는다. 싫어하는 편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어떤 추락은 너무 빠르고 어떤 질주는 너무 숨차다. 하지만 놀이공원의 맹점은 상대성에 있다. 내가 이렇게 버거워하는 놀이기구도 어떤 이에겐, 예를 들어 F1 드라이버나 전투기 조종사에겐 별다른 동요를 일으키지 못한다. 아마 그들에겐 그 지루함이 또 다른 즐거움이 될 수도 있겠지. 이질적으로 알록달록한 ‘환상의 세계’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감정을 경험한다. 영화도 그렇다.
<바빌론>을 다시 관람하면서 나는 여러 번 타 익숙해진 롤러코스터에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 어디서 추락할지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우스꽝스러운 기계에 올라탄다. 예를 들어, 시작부터 ‘더러우면 나가라’는 듯이 머리 위로 분뇨를 싸지르는데 그걸 예상하고도 인상을 찌푸릴지언정 몸을 피하지는 않는 아이러니랄까? 바빌론이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롤러코스터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느끼게’ 만드는 역할. 역사와 고전 등 ‘미식’을 즐기는 고상한 취향부터 똥꾸멍이나 좋아하는 ‘저속한 취향’까지 이 재즈광이 연주하는 보석비빔밥을 먹으면 곧바로 영화불감증이 치료된다. 누구든 한 번쯤 즐거움, 우스움, 혐오감, 연민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영화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로서 최고의 성취가 아닐까?
안전바 없이 내달리는 롤러코스터를 연주하기엔 재즈만큼 좋은 게 없다. 저스틴 허위츠의 놀랍도록 아름다운 스코어에 맞춰 재지jazzy하게 구성된 영화는 언뜻 무질서해 보이나 그 스캣 안에는 역사와 예언이 촘촘하게 얽혀 있다.
데미언 셔젤은 <라라랜드>에서부터 고전영화, 특히 <사랑은 비를 타고>를 노골적으로 오마주하며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다. 비교적 역사가 짧은 만큼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2D 영화에서 3D 영화로 굵직한 전환점을 맞는 영화계의 혼돈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세대라는 건 축복임에 분명하다. <사랑은 비를 타고>가 과도기 끝에 업계에 남게 된 ‘승리자’와 ‘미래’에 주목했다면 <바빌론>은 자리를 잃고 떠나는 ‘패배자’와 ‘과거’를 그린다. 승자의 이야기 속에서 패자는 악당 혹은 웃음거리가 되지만 패자의 이야기에만 존재하는 낭만이 있다. 실패한 예술가를 그린 픽션과 재기에 성공한 예술가의 다큐멘터리가 인기를 끄는 이유다.
‘떠나는 이’를 대표하는 인물인 잭 콘래드는 막 영화계에 입성한 매니와 브로드웨이 배우인 에스텔 앞에서 영화를 말한다. 특히, 영화가 ‘하이엔드high-end’하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아내 에스텔에게 ‘영화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할리우드를 직접 일궈낸 잭 콘래드가 영화라는 매체가 막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기에 어떤 의심과 비난을 이겨냈을지를 상상할 수 있다. 유성영화라는 흐름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진한 애정이 묻어 나온다.
여담이지만 영화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브래드 피트는 배우 본인처럼 보인다. 연기에서 특유의 쿠세가 보인다는 뜻이다. 말할 때 살짝 흔들리는 어깨와 상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파란 두 눈. 전 세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강한 나머지 스크린 밖으로 배어나는 모습을 보며 감독이 일부러 그를 캐스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피어오른다. 그의 얼굴과 연기력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전설과 사생활까지, 브래드 피트라는 인물 전부를 가져와 박아 넣고 그런… 아름다운 엔딩을 가장하게 만들었다는 지독한 의심 말이다. 악의적일 만큼 적절하지 않은가?
또 한 명의 ‘떠나는 이’는 넬리 라로이다. 첫 장면의 붉은 드레스는 불꽃같은 넬리의 속성을 단번에,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불타듯 자유롭게 춤추며 사막 위의 세트장을 누비던 넬리에게 발걸음 하나까지 통제하는 유성 영화 스튜디오는 비좁은 새장이나 마찬가지다. 매니는 그가 불사조처럼 되살아나길 바라지만 넬리는 자신이 날 수 없는 곳에서 날갯짓하기를 거부한다. 그의 마지막 퇴장은 등장만큼이나 어지럽고 강제적이다. 도망치는 매니의 차에 올라 취한 목소리로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반복하던 넬리는 우연히 마주친 카메라 앞에서 큐사인이라도 들은 듯 돌변한다. 누구라도 믿을, 그리고 믿고 싶을 눈빛으로 사랑을 말하던 넬리는 카메라=매니=관객이 사라지자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온다. 그러곤 금방이라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것 같은 검은 배경 속으로 춤추며 사라진다.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넬리가 매니에게 사랑을 말하던 순간 완전히 진심이었으리라고는 믿기 어렵다. 적어도 ‘알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싶은데, 넬리가 영화를, 매니가 관객을 상징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꿈같은 순간을 선사하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게 영화다. 영화에서 ‘진심’을 찾는 건 아무리 매니라도 너무 순진한 것이 아닐까? 잭 콘래드가 쓰레기 같은 시나리오임을 알면서도 영화를 찍으러 갔듯이 넬리 라로이도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등장한 변두리 마을의 축제에서 자신의 마지막 영화-얼굴을 영상으로 남긴다. 결국 배우란, 영화란 카메라에 담기지 않고는, 관객들에게 보여지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기에. 넬리의 자기실현적 예언이 특히 씁쓸한 이유다.
좋든 싫든 영원한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던 대사가 아이러니하게 이 영화는 영원히 남을 것 같지는 않다. 동시대로만 따지면 꽤 오래 보여질 영화지만 그마저도 많이 보여지진 못할 것이다. 특정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만 느낄 수 있는 노스탤지어는 영화가 갈망하는 대중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존재 자체로 불편하고 거슬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넬리와 <바빌론>은 그 목적을 달성했다는 데서 흥행 참패와 각종 영화제의 외면에 낭만성이 부여된다.
소설은 한때 저속한 취급을 당했다고 한다. 고전이니 독서광이니 하는 것에 낭만이 생기는 위상을 얻기까지 못지않게 험난한 여정을 거쳤으리라. 약 15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 역시 그리 숭고한 예술 취급은 못 받았던 것 같다. 할리우드에선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대한민국 경기도 우리 집에선 그랬다. 공부는 안 하고 쓸모없는 영상을 들여다본다고 혼났던 것을 보면... 그러나 이제는 영화가 아주 대중적인 여가거리이자 지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으며 <놉>이나 <파벨만스> 같은 '영화에 대한 영화'가 대형 극장에 걸린다. 영화 역시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질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가 짧은 만큼, 난 아직 영화의 전성기가 오지 않았다고 믿는다. 영화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도 많고, 충분히 사랑받아본 적도 없는 미숙한 어린 아이다. 하루살이처럼 불타 사라지는 영화인들의 얼굴이 당당히 역사를 바꾼 영웅의 반열에 오를 때가 오리라고. 스크린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롤러코스터는 직접 타는 재미도 있지만 몇 십 분씩 줄을 서고, 중간에 포기하고 도망치는 겁쟁이를 구경하고, 소지품을 내려놓고 짝지어 앉아 안전바를 내리는 일련의 과정에서 느끼는 기대감 역시 즐거움 중에 하나다. 그 모든 격정을 뚫고 롤러코스터를 타고나면 누구에게나 영웅담이 하나씩 생긴다. 영화도 그렇다. 더는 낭만으로 살 수 없는 시대에 꿋꿋이 낭만과 희망을 공상하는 데에 영화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